4월은 잔인한 달
우리 지방에서 씨 뿌리기는 3월 말쯤에도 가능하지만 모종 심기는 4월 중순을 넘기는 것이 안전하다. 땅속에 넣어 둔 씨앗은 자신이 자라기에 적당한 시기와 온도를 택해 싹을 틔운다. 하지만 온실에서 싹을 틔운 모종은 온도에 맞지 않으면 낯선 땅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첫해 스물다섯 개의 모종을 심은 탓에 채 다 먹을 수 없었던 경험을 하였지만 그래도 가장 선호하는 봄 작물은 상추이다. 상추 잎에 쑥갓을 조금 올려 입 가득 싸 먹는 맛은 봄의 맛 그 자체이다. 상추 모종은 4월 중순에 밭에 내다 심는다. 우리 지방의 4월 중순 낮 기온은 대략 16~19도 정도이고 가끔 20도가 넘는 날도 있어 따뜻하다. 하지만 밤에는 10도 미만으로 내려가기도 한다. 게다가 봄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 물을 많이 주어도 땅이 자꾸만 버석거리고 흙먼지가 인다.
모종을 심기 위해서는 먼저 알맞게 구덩이를 판 다음 구덩이에 가득 차도록 물을 붓는다. 부은 물이 적당히 스며들었을 때 구덩이에 모종을 조심스레 넣고 흙을 덮어 꼭꼭 눌러 준다. 땅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기 전까지는 바람에 흔들려 뽑힐 수 있으므로, 단단히 지탱할 수 있도록 흙을 모아 꼭꼭 눌러준 다음 다시 물을 넉넉히 부어준다. 그렇게 상추 모종을 심고, 고추 모종 심을 자리에 멀칭(비닐 덮기)을 하고 나면 봄날의 짧지 않은 해도 기운다.
옷에 묻은 흙을 대충 털고 호미를 정리하고 돌아서려면 상추 모종이 눈에 밟힌다. 갓 심어진 상추의 여린 잎이 바람에 마구 흔들리는 모습에 자꾸만 눈이 간다. 날은 곧 어두워질 것이고 밤이 되면 봄밤의 쌀쌀한 기온이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에 상추 모종을 한참 내려다본다. 그럴 때면 마치 상추 모종이 저를 두고 가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따뜻한 온실에서 모종으로 자라던 녀석을 황량한 벌판에 물 한 모금 먹여 남겨두고, 나만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봄밤의 추위는 어떻게 견딜지 바람에 뽑히지는 않을지. 해마다 상추 모종을 내어 심고 돌아온 날은 밤새 바깥소리에 귀 기울이며 잠을 설치게 된다.
문 열어 주세요......
문 두드리는 소리 들려 몇 번이고 뛰어나가 문을 열어보지만 깜깜한 복도엔 밤바람만 나뒹굴 뿐 냉수를 몇 사발 들이켜도 베란다에 나가 별을 세고 세어도 밤은 길고 새벽은 멀다 품을 떠난 아이들은 어떻게든 자란다고 위로하려 해도, 내어 심은 봄 땅이 거칠고 퍼석거려도 곧 단단해지겠지 생각하려 해도
들판에 어린아이를 두고 온 듯이 낯선 땅에 심어놓은 상추 모종을 걱정하던 일주일이 지나 주말에 가 보면 상추는 언제나 씩씩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녀석은 마음 약한 나를 매년 놀려먹는 것 같다. 일주일 만에 몸의 크기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아도 잎을 가만히 보면 힘이 있다는 것을, 잘 정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봄에 심은 상추가 잘못되는 경험은 아직 한 번도 없다. 정성 가득히 잘 심은 덕분인지 마음 약한 나를 생각해서 씩씩하게 잘 자라 준 것인지.
그렇게 상추 모종은 봄마다 꼭 한 번씩 내 마음을 시험한다.
상추는 낯선 땅에 금세 정착한다. 먹을 만한 잎을 모두 따도 한 주 지나서 가면 또 그만큼의 잎을 키우고 있다. 모든 작물이 그렇듯이 상추가 한창 자랄 때는 상추와 벌이는 한판 전쟁 같다. 상추의 일생은 꽃을 피워 열매 맺어 땅에 뿌리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고, 인간인 나는 열심히 잎을 따 먹어서 상추의 생장을 최대한 늦춰야 한다. 잎을 먹는 채소는 꽃을 피우고 나면 먹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전쟁은 언제나 상추의 승리로 끝난다. 자연의 순리가 그러하듯 어느 틈에 상추는 꽃대를 올리고 꽃을 피워 버린다.
상추 승!
그리하여 상추는 올해도 어김없이 씨앗을 만들어 후손을 잇게 되었고, 나의 봄 상추 파티는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