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겨울, 친구와 참새 구이집에 앉아 있었다.
좁은 가게 안은 연기로 가득했고,
불 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맥주 거품 터지는 소리가 뒤섞였다.
우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술을 따르고, 고개를 끄덕이고,
서로의 피로가 스며드는 걸 조용히 바라봤다.
그날 친구가 건넨 술이 있었다.
칸빠레 오토상(がんばれお父さん) — “힘내요, 아버지.”
듣자마자 웃음이 났다.
이름이 너무 솔직해서, 너무 슬퍼서.
그 친구는 그 술의 이야기를 해줬다.
일본의 한 시대,
끝이 보이지 않는 경기 침체 속에서
회사원들이 퇴근 후 편의점에서 사서 마시던 싸구려 팩사케.
화려하지도, 맛있지도 않지만
그 한 모금에 하루를 버텨낼 힘이 담겼던 술.
그 친구는 그걸 “가장들의 현실 같은 술”이라 했다.
그로부터 2년 뒤,
그 친구는 세상을 떠났다.
너무 빨리, 너무 조용히.
이제 나는 가끔 그 술을 산다.
맛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날의 공기와, 그 친구의 얼굴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참새 구이집의 연기,
서로 아무 말 없이 마주 앉던 순간,
그리고 “힘내요, 아버지”라는 문장이
술의 향기와 함께 돌아온다.
이 술을 나와 함께 마실수록
그 친구도 나와 함께 있는 것 같다.
잔을 비울 때마다
그가 내 옆에서
“야, 잘 버티고 있네.”
하고 말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떠났지만,
그날의 분위기와,
그 술의 온도는 아직 내 곁에 남아 있다.
아마 그게,
우리가 누군가를 진짜로 기억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