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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의 기도

by 참울타리

어릴 적 나는 고모가 키워주셨다.

우리 가족은 피난민이었다. 고모는 이북에서 전쟁을 피해 내려오셨고, 고모부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기 전까지 우리는 여러 식구가 한 아파트에 함께 살았다.

어머니가 여동생을 임신하자, 고모는 나를 대신 돌봐주셨다.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그런 시간이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어린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엄마가 없는 아이일까?”


밤이면 고모는 내 곁에 앉아 손을 잡고 기도하셨다.

“이 아이에게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명철을 주소서.”

그 나지막한 음성, 그 따뜻한 숨결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그때는 그 말의 뜻을 몰랐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 기도는 내 인생의 가장 오래된 축복이었다.


고모는 언제나 조용한 분이었다.

말보다 기도로, 훈계보다 눈빛으로 나를 이끄셨다.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는 어린 내가 다 알 수 없었지만,

그분의 두 손에 스민 기도의 흔적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나는 고모가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곤 했다.

그 속의 인물들이 마치 내 친구처럼 느껴졌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나만의 상상의 세계를 펼쳤다.


엄마가 없는 아이 같았던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에야 엄마와 아빠의 극진한 사랑을 먹고 자랐다.

제 새끼는 누구나 예쁘다지만,

엄마는 그동안의 부재를 보상하듯

더 깊고 진한 사랑으로 나를 품어주셨다.


내리사랑이란 말이 있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고모의 사랑을 점점 잊어갔다.

그 따뜻한 손길이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즈음,

엄마는 가끔 고모와의 갈등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사랑의 모양이 다를 뿐인데,

그 마음들은 서로를 오해한 채 엇갈려 있었다.


나는 두 분 다 사랑했지만,

그들 사이의 갈등은 어린 나의 세상을 둘로 갈라놓았다.

그때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고모를 더 이상 예전처럼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야 안다.

그건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감당하기엔 너무 어린 마음의 혼란이었다는 것을.


도미 후 한국에서 지낸 시간들은

부모님과 함께 있기만 해도 늘 짧았다.

멀리서 지내온 세월만큼

함께 있는 하루하루가 더 소중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고모는 이제 아흔을 훌쩍 넘긴 노인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전언으로, 고모가 나를 그리워한다고 들었다.

인지 기능이 약해지고, 경도의 치매 증상도 보인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었지만,

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선을 그었다.

그분의 자녀는 내가 아니니까.


아버지는 혼자 남은 고모를 늘 안쓰러워하셨다.

휴가차 한국에 온 내가 있으면

“이번엔 같이 인사드리자” 하시곤 했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진 나는

그건 이제 불필요한 일이라며 조심스레 선을 그었다.

이제는 내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내 삶을 돌보는 게 우선이라며

마음을 달래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알았다.

그 말은, 마음의 문을 닫기 위한 핑계였다는 걸.


이번 한국 방문에서

나는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고모께 인사드리기로 했다.

내가 기억하던 그분은 온데간데 없고,

키가 더 작아지고 인지 기능이 흐려진 노인만이 자리에 앉아 계셨다.

그럼에도 고모는 나를 알아보려 애쓰셨다.

손을 내밀어 내 손등을 문지르며,

그 따뜻한 촉감으로 나를 기억하고 싶어 하셨다.


그 순간, 마음 한켠이 무너졌다.

마치 마지막을 예감하고 엄마를 애처롭게 바라보던

우리 집 반려견 뽀뽀의 눈빛이 겹쳐졌다.

남은 힘을 다해 사랑을 표현하는 존재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이 들어버린 고모의 얼굴을 마주하자,

어릴 적 내 곁에서 성경 말씀을 읽어주시던 그 모습이 겹쳐 보였다.

가슴이 미어지는 일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분의 손을 잡고, 오래도록 놓지 않았다.


나는 우리 엄마가

한때 자신에게 아픈 기억을 남긴 시누이,

그러니까 나의 고모를

정말로 용서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이 들어버린 고모의 모습 앞에서

그런 생각조차 무의미해졌다.


나는 나쁜 사람이었다.

그분은 나에게 아무 대가 없이 사랑을 베풀어주셨지만,

나는 어쩌면 큰 오해를 품은 채 지금껏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다음번 한국 방문 때까지

고모가 여전히 이 세상에 계실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분이 내 손등을 문지르며 반가움을 전하던 그 따스한 온기,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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