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그거 알아? XX형님 췌장암 진단 받았다는 거?”
날벼락 같은 카톡이었다.
해외에 있던 나는 한참 동안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다가
믿기지 않는 마음으로 형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은 의외로 담담했다.
“췌장염인 줄 알았는데, CT 찍어보니 이미 전이된 췌장암이래.”
형님 자신이 소화기내과 전문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많은 사람의 췌장을 들여다보던 분이
정작 자기 몸속에서 자라난 병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셨다.
의학이 사람의 생을 지탱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잔인할 만큼 무력하다는 걸 그 순간 실감했다.
나는 주저 없이 한국행을 택했다.
형님을 뵙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펑펑 울며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를 보며
형님은 오히려 웃으며 말씀하셨다.
“야, 이놈아. 니가 나를 벌써 골로 보내는구나.”
그 말투엔 서운함보다 걱정이 묻어 있었다.
울고 있는 동생이 안쓰러워서,
형님은 끝까지 농담처럼 웃어주셨다.
2년여의 항암 투병 동안,
형님은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
나는 6개월마다 형님을 찾아뵈었다.
방문할 때마다 조금씩 빛을 잃어가는 얼굴을 보며
마음속으로는 이별을 예감했지만,
우리 누구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형님, 다음에도 이렇게 건강하게 보는 거예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의사로서의 나 자신이 참 싫어졌다.
내가 누구보다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물었다.
“형, 두렵지 않으세요?”
형님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난 남겨질 집사람이 제일 걱정돼.”
그 말에 담긴 무게는 병보다 더 컸다.
그 순간만큼은, 언제나 담담하시던 형님이
처음으로 예의 그 미소를 거두셨다.
그 말 이후로, 형님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다.
병상에 누운 형님은 더 이상 예전의 그 미소를 짓지 못했다.
강한 진통제 탓인지, 잠시 현실과 꿈을 오가며
섬망 증세를 보이던 형님의 모습은 참 낯설었다.
늘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보던 의사가
이제는 자신이 돌봄의 대상이 되어 있는 모습.
나는 그 장면을 끝내 익숙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형님의 관을 운구하던 그날,
공교롭게도 형수님의 생일이었다.
화장터에서 잠시 짬이 났을 때,
나는 작은 생일 케이크를 형수님께 전해드렸다.
형님이 계셨다면 “그만 울어라” 하셨을 것 같다.
며칠 뒤 들은 이야기였다.
형님은 자신의 앞으로 들어온 부의금을
한 수녀회에 모두 기부하셨다고 했다.
자녀들에게 조금이라도 남기실 법도 한데,
끝내 그러지 않으셨다.
그렇게 형님은 세상에 빚 한 점 없이,
사람들 걱정을 다 품은 채로 떠나셨다.
어쩌면 그게 형님다운 마지막 배려였는지도 모르겠다.
⸻
형님의 어릴 적 소망이 어떤 것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위인전에 남을 만한 위인이었을지도,
사회에서 인정받는 성실한 가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죽음 앞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은
멋진 인생을 보았다.
세상에 원망과 아픔보다 빛을 남기고 간 사람 —
나는 그렇게, 우리 형님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