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 결핍 속의 리듬

결핍의 도시에서 배운 건, 인간의 온기였다.

by 참울타리

쿠바 여행 때의 일이다.

미국의 경제 제재로 물자가 부족한 아바나에서는

제대로 된 변기 뚜껑 하나 찾기조차 어렵다.

그런데도 거리엔 세월을 이긴 듯한,

화려하게 튜닝된 올드카들이 씽씽 달린다.

결핍과 낭만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도시 —

그게 내가 만난 아바나였다.


사람들은 순박했고, 정열적이었다.

골목마다 쿠바의 댄스 음악이 흘렀고,

그 위로 시가 연기가 천천히 흩어졌다.

삶은 단출했지만, 표정엔 이상할 만큼의 여유와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살사와 룸바, 차차차를 추는 사람들을

거리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음악이 흐르면, 아이든 노인이든 몸이 먼저 반응했다.

쿠바에서 춤은 취미가 아니라, 삶의 언어였다.

그들은 가진 것이 적어도, 내일을 미루지 않았다.

그날의 노래와 춤으로 오늘을 채웠다.


그때였다.

한 남자가 애완 거위를 끌고 골목으로 나왔다.

처음엔 그가 거위를 이용해 구걸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골목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아이들이나 거위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천천히 말을 걸었다.

아이들이 다가오자 그는 거위를 만져보라며

조심스럽게 허락까지 해 주었다.

그의 발 앞에는 동전이 아닌, 아이들의 웃음만이 쌓여 있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나온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사랑을 나누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 순간, 결핍이라는 단어가 낡게 느껴졌다.


며칠 뒤, 또 하나의 장면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파리의 관광객을 노리는 강도단이나,

로마의 소매치기 같은 이야기들로 단단히 무장하고 떠났던 나는

이 가난한 나라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 짐작했다.


아바나의 좁은 골목을 캐리어를 끌며 지나가는데,

맞은편에서 행색이 초라한 한 사내가 다가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

가난한 나라의 소매치기란 이런 모습일까.

비겁하게도, 그 순간 나는 사람보다 캐리어 손잡이를 먼저 붙잡았다.

그건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어쩌면 내 안의 불신이 만든 반사 신경이었다.

나는 늘 세상을 먼저 의심하고,

사람보다 위험을 먼저 떠올리며 살아왔다.


사내는 내 캐리어에 손을 뻗었다.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간 그 순간,

그는 아무 말 없이 캐리어를 들어

도로변의 보도블록 위로 옮겨 주었다.

곧이어 자동차 한 대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 대신, 죄책감이 목울대에 걸렸다.

그는 휘적휘적 골목 밖으로 사라졌고,

그 뒷모습이 작아질수록

내 안의 목소리가 커졌다 —

나는 세상과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쉽게 가시를 세우며 살아왔던가.

그리고 그 가시 끝이 결국 나 자신을 찌르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날 밤, 바람에 섞여 모히또의 향기가 흘렀다.

가난하다고 부정직하고, 순수가 없을 거라 믿었던 내 편견은

그 향기와 시가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부끄러웠던 건 가난이 아니라,

날을 세우고 살아왔던 나의 마음이었다.


그날 밤, 나는 그 아저씨의 친절을 곱씹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굳은 편견이 서서히 풀리듯, 마음이 낯설게 흔들렸다.

사람을 다시 믿는 일,

어쩌면 세상을 다시 배우는 일인지도 몰랐다.

캐리어 손잡이 위엔

아직도 아저씨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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