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에는 수많은 ‘과’가 존재한다. 사람의 몸을 기능별로 나누어 맡아 보는 일. 그중 내과는 환자가 눈에 띄게 나아지는 순간이 드물다. 대부분의 질병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듯, 치유 또한 느리게, 더디게 움직인다. 그만큼 치료는 그 사람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때로는 그 삶의 일부를 내려놓게 해야 한다.
의대 시절, 나는 단 한 번도 수술과에 끌려본 적이 없었다. 수술실의 긴장감, 그곳에서 필요했던 폭력적인 에너지, 그것은 내 성향과 맞지 않았다. 반대로 내과는 조금 더 여유가 있었고,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이 나에게는 잘 맞았다. 그래서 선택했고, 어느새 이십 년이 흘렀다.
하지만 오래 하다 보면 사람에 지칠 때가 있다. 이 일이 결국 ‘사람을 계속 마주하는 일’이라는 사실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날들이 있다.
32살 멕시코 이민 여성.
오래된 당뇨가 눈까지 침범해 시력을 거의 잃었다.
나이 든 부모가 대신 인슐린을 주사해드리지만 당조절이 어렵다 보니 당뇨성 혼수로 자주 입원하시는 분이다. 입원하면 늘 마약성 진통제의 정맥 투여를 요구한다.
퇴원할 때가 가까워지면 늘 “죽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 병원 시스템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지점을 정확히 알고 건드리는 방식이었다. 원하는 약을 조금 더 받기 위해, 퇴원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처음에는 오죽하면 저렇게까지 할까 싶었다. 그러나 오래 마주하다 보니 그런 생각조차 흐려지고, 이번에도 또 그러는구나 하는 마음만 남는다. 누구를 이해하려는 마음도, 판단하려는 마음도 희미해지고, 서서히 사람 자체에 대한 신뢰가 깎여 나가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나는 사람에게 지치고,
때로는 꼴보기 싫다고 느끼는 다른 사람들이
또 한편으로는
내게 가장 큰 위로를 주는 존재들이기도 하다는 걸 안다.
와인 모임에서 좋은 와인을 같이 나눌 때, 자전거방에서 먼 길을 서로 도닥이며 완주할 때, ‘같이’라는 감정이 주는 충만함은 혼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종류의 행복이다. 그 순간들은 내가 이 일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확인시켜준다.
가끔 문득, 왜 그때 진단방사선과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후회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누군가의 삶이 흔들리는 순간, 작은 위로 한 마디를 건넸을 때 그 말이 다시 내 마음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순간들 덕분에 나는 또 하루를 버티고, 또 회진을 돌고, 또누군가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과 의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절망에도, 행복에도 완전히 기울지 않고 그 사이의 미세한 균형을 붙드는 일일지 모른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고, 날아갈 듯 날아가지도 않은 채, 흔들리는 자전거를 조심스럽게 몰아가는 삶.
넘어지지 않기 위해
계속 페달을 밟아야만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