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전략이 아니다.

by 참울타리

얼마 전, 고령·고차수 시험관 시술을 이어 오고 있는 한 인플루언서의 인스타그램을 보게 되었다. 오랜 시험관 여정을 계속해 온 그 사람은 오십대 중반의 나이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배아 이식을 앞두고 한 편의 글을 올렸다. 시험관을 앞둔 불안과 희망, 그리고 주치의에 대한 감사. 어디서나 익숙하게 마주칠 수 있는 이야기였고, 그래서 처음에는 특별할 것 없어 보였다.


난임을 겪는 부부가 다섯 쌍, 많게는 여섯 쌍 중 하나에 이를 정도로 난임은 이제 드문 문제가 아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고, 비슷한 경험담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기울인다. 여기에 고령 산모가 점점 늘어나는 사회적 흐름이 더해지면서, 시험관 시술을 전면에 내세운 인플루언서들의 포스트와 릴스가 하나의 유행처럼 소비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 글을 읽으며 마음 한편에 묘하게 걸리는 지점이 남았다.
첫째는 그 사람이 오십대 중반의 나이라는 점이었고,
둘째는 유전자 검사 없이 3일 배아로 이식을 진행했다는 사실이었다.


의학적으로 임신 성공의 가능성은 난소 나이에 크게 좌우된다. 오십대 중반에서의 시험관 시술 성공률은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기적 같은 성공담들은, 그 이야기 뒤편에서 조용히 탈락해 간 수백 명의 환자들의 소리 없는 비명을 지워 간다. 사람들은 결국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 역시 그 희박한 성공의 숫자 하나가 될 것이라 믿으며, 마치 셀프 최면을 걸 듯 의학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부담이 큰 여정들을 감내한다. 그 과정에서 유산과 반복된 실패가 남기는 깊은 우울과 정신적 후유증의 이야기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서사는 어디에도 잘 자리하지 못한다. 인스타그램의 세계에서는 성공과 희망만이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고령의 산모에서는 배아의 염색체 이상 확률이 높아진다. 난소 나이가 증가하면서 잘못된 세포 분열이나 손상이 누적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많은 배아는 5일 이상 배반포 단계까지 살아남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의 시험관 센터에서는 3일 배아라도 자궁에 이식해, 자궁 환경 안에서 한 번 더 가능성을 살려보자는 전략이 자주 사용된다. 문제는 이런 선택이 유전자 이상을 가진 배아의 착상 실패나 계류 유산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고령 환자에서 반복된다는 점이다.


자원의 문제, 제도와 비용, 환자의 선택권 같은 조건들로 인해 각 나라의 시험관 센터들이 취하는 전략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고령 산모의 경우, 배아를 배반포 단계까지 배양한 뒤 유전자 검사를 시행하고, 유전적으로 이상이 없는 배아를 선별해 이식하는 방식이 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의 고령·고차수 시험관 환자들은 시험관 담당의와 특수한 관계를 맺게 된다. 여러 센터를 전전하고 수많은 선택을 거치는 과정에서 담당 의사와의 라포는 점점 단단해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고 있는 시술을 맡긴 의사와의 관계는, 어느 순간 수평적인 의료 관계를 벗어나 신앙에 가까운 형태로 굳어 간다.


냉정하게 이야기해 보자. 오십대 중반의 고령 시험관 환자가 3일 배아를 자궁에 이식해, 화학적 임신이나 계류 유산을 넘어 출산에까지 이르는 정상 임신을 할 확률은 사실상 거의 0에 수렴한다. 고령 임신에서 흔히 동반되는 임신성 당뇨나 임신중독증 같은 합병증의 위험을 논외로 하더라도, 이 확률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담당 의사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시술을 진행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그대로 환자에게 전하고 시술을 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순간, 그 의사는 예비 산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차갑고 무정한 사람으로 쉽게 낙인찍힌다. 반대로 시술을 계속해 주는 ‘따뜻한 의사’를 찾아 나서는 일은 환자에게 그리 어렵지 않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사회이고, 비용을 지불하면 원하는 시술을 진행해 줄 의사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아이를 간절히 바라는 고령 시험관 환자의 개인적인 의지와, 시장 논리 안에서 움직이는 의료가 결합한 이 구조는 결국 몇 개의 드문 성공담을 만들어 낸다. 기적처럼 포장된 그 이야기들은 또 다른 성공을 꿈꾸는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그러나 그 뒤편에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사라져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야기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고령·고차수 시험관 시술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얼마나 성공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감성이나 희망이 아닌 숫자로 충분히 제공되고, 그 이해를 전제로 한 선택이 제도적으로 보장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감성 어린 성공담은, 신체와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생채기를 남길 수 있는 시술 앞에서조차 자본주의적으로 포장된 ‘희망’으로 소비되기 쉽기 때문이다.


오십대 중반의 한 인플루언서가 배아 이식을 앞두고 희망에 차 춤을 추는 릴스를 보며, 마음이 무척 무거워졌다. 개인적으로는 그분이 이번만큼은 꼭 성공하길 바란다. 다만 의사의 시선에서 그 춤은, 머지않아 무너진 희망을 이야기하게 될 또 하나의 슬픔의 릴스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희망은 근거 없는 기적을 기다리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희망이란, 막다른 골목에 몰린 고령·고차수 시험관 환자들에게 이제 그만해도 괜찮다고 사회가 말해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생긴다. 그만둘 수 있는 용기, 자녀를 갖는 것이 인생의 큰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괜찮다는 사회적 시선이 자리 잡을 때, 고령·고차수 시험관 환자들이 인스타그램에서 소비된 뒤 실패의 이면에서 조용히 눈물을 삼키며 물러나는 일은 조금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Hope is not a strategy.”


희망은 “이번엔 될 거예요”라는 의사의 말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희망은, 다소 차가워 보일지라도 숫자와 확률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전략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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