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이분, 벌써 세 번째 투석 방문이에요.”
곤란한 기색으로 응급의학과 동료가 말을 꺼냈다.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합법 이민자도, 흔히 말하는 불법 체류자도 어렵지 않게 마주친다. 그들 가운데에는 혈액투석이 필요할 만큼 신장이 망가진 사람들도 있다. 중남미 출신 불법 체류자들이 비싼 미국 의료보험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이들은 매주 한 번이나 두 번, 응급실을 통해 투석을 받으러 온다.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세 번 투석을 받아도 정상 신기능의 20퍼센트 정도만 겨우 유지된다. 그보다 적은 횟수로 버티는 이들의 상태가 좋을 리 없다. 매주 한 주 한 주가 지날수록 더 나빠지는 모습을 보면서, 엄밀히 따지면 입원 적응증에는 맞지 않지만 결국 입원시켜 혈액투석을 제공해 온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일주일에 세 번 투석을 받겠다고 고집하며 그동안 암묵적으로 유지되던 선을 넘어서는 환자가 나타난 느낌이었다.
입원 치료에 드는 비용은 결국 납세자의 몫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 일주일에 세 번 투석을 받고 싶겠지만, 현실과 타협한 끝에 한 번 내지 두 번 응급실을 찾고 있을 뿐이다. 살고 싶어서 온 이 사람을 내쳐도 되는 걸까. 매주 불충분한 투석으로 버티는 사람들은, 대개 1~2년 안에 더 이상 병원에서 보지 못하게 된다. 이 사람에게 예외를 허용하는 순간, 모두가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받으려 할 것이다.
미국 콜로라도주에는 이런 사람들에게 투석을 제공하는 외래 센터 프로그램이 있다. 응급실을 통한 반복 입원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과, 외래 센터를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을 비교한 끝에, 후자가 더 합리적이라는 데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해진 모델이다.
나는 칼을 꺼내든 심정으로, 현재로서는 응급 투석 적응증에 맞지 않으니 다음 주 초에 그녀를 다시 병원에 내원하도록 하자고 동료와의 통화를 마쳤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레지던트 시절의 장면 하나가 선명하게 겹쳐 떠올랐다. 응급 투석 적응증에는 맞지 않는다며 집에 가셔야 한다고 설명하자, 침대에 반쯤 몸을 기대고 앉아 있던 히스패닉 아주머니가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떨구던 순간이었다. 축 늘어진 어깨, 주름진 손등 위로 힘없이 떨어지던 눈물, 울음을 삼키느라 떨리던 입술. 그 파리한 얼굴이 오래된 사진처럼 불쑥 떠올라, 지금 막 결정을 내려놓은 손끝을 다시 붙잡았다.
모든 선택은 완벽할 수 없다. 사회적 문제가 의사의 개인적 윤리와 맞물리는 이 지점은 늘 가장 마음 아프고 견디기 힘들다. 다른 불법 체류자 투석 환자들과의 형평성과, 이분의 의학적 입원 적응증을 함께 놓고 보면 이번 결정은 설명 가능하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 깊숙한 곳이 찔리는 이 감각은, 결국 살고자 한 사람을 밀어냈다는 감각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