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너무 지쳐 있음
그러니까, 우리 집에 세탁기라는 물건이 생겼을 무렵이니 아마 대여섯살 때 쯤인 것 같다. 우리는 마당이 있는 방 세 칸짜리 주택에서 전세를 살았고, 또 그 중 한 칸은 사글세를 주었다. 집 근처 공터와 오르막 위 큰 길 - 지금 돌이켜 보면 아마 2차선 도로였겠다 - 이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이다.
엄마에게 오십원 짜리 동전 하나를 얻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 옆집 친구가 가진 새 장난감을 나는 왜 가질 수 없느냐 하는 일이 죽느냐 사느냐와 맞먹을 정도의 진지한 사안이었던, 좋았던 시절이었다. 아니, 하루키의 말처럼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면 대개는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던가.
사글세 들어 살던 집 누나들은 날 꽤나 살갑게 돌봐줬다. 친구들보다 누나들과 노는게 더 좋았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꼬꼬마랑 놀아주느라 힘 좀 들었을게다. 작은 누나가 연탄 곤로에 라면땅을 해줬던 날이 있었는데 - 와우 세상에 이런 맛난게 있었다니! - 마침 외출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굉장히 민망해하고 고마워하던 기억도 난다. 그 누나들도 갓 중학생 정도였는데, 한참 어린 아이들이 날 챙기느라 위험하게 매캐한 연탄불 앞에 앉아 땀 흘리는게 미안하셨겠지.
마당은 텃밭이었고, 운동장이었고, 정원이었다. 마당 한 쪽은 덩치에 안 맞게 순한 백구를 길렀다. 남은 밥 비벼 만든 개 밥 그릇을 들고 개를 향해 던져주던(?) 기억이 난다. 주워 온 판자를 톱질 하고 망치질 하며 개 집을 뚝딱 만들어 내던 아버지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부모님은 가을이 되면 낙엽 쓰는 일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아침 공기에 낙엽 연기 실어 보내기를 반쯤 취미 삼아 하셨던 것 같다. 파와 상추가 자라던 텃밭은 겨울이 오면 깊게 파내 김장독을 묻었다. 김장 비닐이 비죽비죽 솟은 부근에 실수로라도 걸음을 옮길라치면 어디선가 나타난 엄마의 호통이 마당을 울렸다. 밤새 함박눈 펑펑 내린 아침, 적막함에 눈 떠 마당에 첫 발자국 내는 일은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는지. 무엇보다 봄이 끝날 무렵 마당을 하얗게 덮던 목련이 기억에 남는다. 사철을 숨 죽이듯 있다가 봄이 오면 하늘이 덮이도록 새하얀 꽃을 피워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급하게 꽃잎이 지곤 했다.
그 때 어머니는 스물 아홉, 아버지는 서른 여섯 쯤 이었을 거다. 당신들께도, 좋았던 시절이었으리라.
시간이 흘러 언덕길 2층 집으로 이사할 무렵에는 나도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내 세상도 길 건너 학교 뒷골목까지 확장되었다. 더 이상 처음 보는 단어에 신기해 하지도 않았고, 눈이 오는건 여전히 신나는 일이었지만 첫발자국 남기는 일에 설레이지 않았다. 나이 들수록 만사에 심드렁해지는 건 어릴 때 처럼 하루가 온통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지 않아서라고 하던데, 나는 왜 그리 빨리 익숙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세상에 좀 더 오래 감탄하고 신기해해도 괜찮았을거다.
자려고 누웠는데 문득 마당에 어지럽게 흩뿌려있던 목련 꽃잎이 생각났다. 이제 우리는 마당 없는 아파트 생활을 30여년 가까이 하고 있고, 더 이상 개는 키우지 않으며, 꾸역꾸역 조그만 공간이라도 찾아 묻던 김장독을 김치 냉장고가 밀어낸 것도 10여년 쯤 되었다. 나는 - 당연한 말이지만 - 초등학교 때 보다 더더욱 하루 대부분을 심드렁하게 보낸다. 내 세상도 그 때보다 훨씬 더 넓어졌고, 이제는 같은 날의 반복 속에 점점 더 작아져간다.
매일이 새로움의 연속이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 권태와 나른함으로 가득한 일상이 아닌, 두근거림으로 가득한 날들을 다시 살아 내고 싶다.
그 집 마루에 앉아 들었던 산타는 없다는 아버지의 폭탄 선언도, 심부름 하다 넘어져 맥주병을 모두 깨버렸던 기억도, 거금 오천원을 잃어버리고 엄마와 함께 찾아 헤메던 일도, 좁은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숨바꼭질하며 놀던 일도....
다시 매일이 그렇게, 흥미 진진하고 신나는 날들이라면 살아볼 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