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못한 말

깊은 밤 대나무 숲

by truefree

한 때 사랑했던 이의 막역한 친구, 착한 동생, 좁디좁은 내 인간관계에 오래도록 자리를 지킨 사람. 알고 지낸지 삼 년이 지나서야 자기 얘기를 하나 둘 씩 꺼내 놓던 묵직하고 신중한 사람. 언제나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즐겨하는, 남에게 모질지 못 해 답답할 만큼 착한 사람. 손발이 오그라드는 내 질척거리던 연애사도 구박 한 번 없이 묵묵히 지원사격해주던 수더분한 사람. 밤 잠 없기는 나보다 더 심해서, 늦은 시간에도 커피 한 잔 하자고 문득 연락할 수 있던 마음 편한 사람.


이제는 철 지난 영화, 러브레터의 카피였던 '그는 나의 연인이었습니다' 식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나의 친우였다. 지인이라는 이름으로 스무 해를 알아온 그녀가 결혼한다.




물론 스무 해를 온전히 지근거리에 있지는 않았다. 무슨 일 하며 지내는지 잘 모르던 시절도 있었고, 몇 달 만에 만나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묻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도 만나면 반가움은 여전했고, 오랜만에 보는 타인들처럼 어색하지는 않았다. 청년기를 함께 보내면 그런 유대감 같은 게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는지...


싸구려 커피 향과 함께 마주 앉은 날이면 어디 가서 못 할 얘기들을 서로 - 아니 생각해보니 또 나 혼자만 한 거 같다 - 많이도 나눴다. 회사 얘기, 친구 얘기, 썸 타는 사람, 집안일... 막막한 날이면 그렇게 두런두런 갈 곳 없는 얘기를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그렇다. 그녀에게는 삶을 견뎌낸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가 있다. 삶이 가져다준 덤덤하고도 진중한 시선으로, 우린 서로의 대나무 숲이었다 - 라고 감히 말해본다. 내가 그에게 기댔던 만큼 그도 나에게 기댔던 거라면 좋겠다.


소개팅을 했다는 얘기, 남자친구가 되었다는 얘기를 마지막으로 그런 시간들은 드라마틱하게 줄어들었고 - 당연한 일이다 - 지난 초겨울엔 상견례 얘기를 하더니만 어제 드디어 청첩장을 받았다. 쓸쓸할 일이 아닌데 쓸쓸한 감정이 드는 것이 스스로가 우습다. 어쩌면, 다시 그런 밤들을 보내기 어렵기에, 대나무 숲을 잃은 섭섭함이 아닐까 싶다가도, 이게 뭔 미친 소린가 싶어 역시 우습다.


바래다준 차 안에서 결혼식 날 보자며 악수를 나눴다. 그녀의 연애 전이라면 분명 커피나 한 잔 더 하자며 가까운 카페로 차를 돌렸을 텐데, 아쉬움이 진하게 손 끝을 타고 흘렀다. 때로는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말들도 있다. 객쩍은 웃음과 가라앉은 공기로 전해지길 바라는, 나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감정들.



그동안, 고마웠어.


이 말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 않는 게 나은 걸까, 뒤늦게 고민된다. 채 말이 되지 못한 감정들과 함께 아쉬움 속에 묻어 두기로 하고 혼자 작게 한번 읊조려본다 - 고맙다.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