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하게, 백수이고 싶다

이 놈의 로또...

by truefree

기록을 뒤져 보니 처음 로또 6/45가 시작된 것이 2002년, 햇수로 17년을 거의 매주 구매하고 있다. 한 주에 5천 원씩 17년으로 계산하면 정확히 4,420,000원이다. 5만 원짜리 서너 번 당첨되었으니 430여만 원을 사회에 기부한 셈이다. 한 게임당 2천 원씩 하던 시절에도 만원씩 꼬박꼬박 샀으니 실제로는 더 나갔겠지. 누가 그랬더라, 복권이란 머리 나쁜 이들에게 걷는 세금이라고.


20대 때는 로또 당첨금 별 액션 플랜이 세워져 있었다. 최종 목표는 40억. 현금 자산이 40억 이상이면 돈이 얼마나 많든 삶의 양상이 고만고만하다기에 40억으로 잡았다. 일단 10억이 안되면 사채를 놓든 펀드를 굴리든 10억을 만들어야 한다. 10억이 되어야 간신히 목 좋은 곳에 주차장을 만들거나 러브호텔을 매입할 수준이 된다... 뭐 그런 식이다. 인정한다. 엉성하다. 하지만 마스터플랜은 엉성해 보이는 법이고 계획의 현실성과 위험성 같은 건 일단 1등이 되고 난 뒤 검토해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1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늦지 않았다. 그동안 부동산이 비싸지고 모텔이 비싸지면서 10억과 20억 사이의 갭을 좀 메워야 하지만, 그것도 1등 된 다음에 생각해보지 뭐.


테슬라의 마스터플랜.. 머스크는 이렇게 잘하던데 나는 왜!!


그렇게 40억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회사 계속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2019년이 된 지 3개월 만에, 이제는 당첨금 10억이면 미련 없이 사표를 쓸 것 같다. 바뀐 업무가 생경스러운 까닭도 있고, 깜냥에 비해 너무 많은 역할이 요구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제 나이 들어 쉬이 지쳐서 일수도 있겠다. 20년 25년씩 회사 생활 이어온 선배들이 새삼 대단스럽다 - 이 짜증 나고 울화 치밀고 때로는 미친 척 도망쳐버리고 싶은 일들을 어떻게 참아내며 긴 세월 근무했을까.


맞다. 지금 나는 딱, 도망치고 싶다.


죽은 듯 지내는 주말이 매일이 되면 좋겠다. 오후 햇살이 눈을 찌를 때야 부스스 일어나, 침대 발치에 멍하니 앉아 있다 느릿느릿 샤워를 하고, 오늘은 뭘 할까 고민하다 결국 또 집 앞 카페에서 커피와 책으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일상이라면 좋겠다. 하루 중 가장 다급한 연락은 차 좀 빼 달라는 전화 정도고,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받거나 요구할 일도 없으면 좋겠다. 세탁과 청소가 귀찮아 미루고 미루다 해 떨어진 뒤에야 간신히 해치우듯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내가 하고 싶을 때 하고 싶다. 그런 걸 자유라고 부르던가?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별로 자유롭지 못한 모양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일하고 있는데 별로 행복하지 않다. 10억이면 적게 먹고 적게 싸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더니 글쎄, 이제 나이가 좀 들어서 그런지 남은 인생 다 살 때까지 10억이면 괜찮다는 계산이 나온다. 대충 40년 더 살아도 - 나 같은 골초가 40년씩이나 더 살 수 있을 리 없다 - 1년에 2,500만 원씩. 한 달에 200 정도 쓸 수 있으면 괜찮지 않나? 집도 있겠다 차도 있겠다 싱글이라 돈 쓸 일도 별로 없고. 10억에 이자도 좀 나올 테니 실제로는 여윳돈도 좀 만들 수 있겠다.


인정한다. 엉성하다. 하지만 마스터플랜은 엉성해 보이는 법이고 계획의 현실성과 위험성 같은 건 일단 1등이 되고 난 뒤 검토해도 늦지 않을 거다. 제발, 제발, 이제 한번 터져줄 때도 됐잖아! 신이시여, 저 이제 40억 같은 욕심 다 버렸으니까 세금 떼고 실수령액 10억만 딱 맞춰줍시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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