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혹은 H에게
아직 간간히 꿈을 꾼다. 네가 나오는 꿈이다. 꿈속의 우리는 예전 모습이기도, 겪어본 적 없는 낯선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다 눈 뜬 날은 무릎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잠시 숨을 골라야 한다. 잠시. 쌓인 시간만큼 기억에 무던해지기도 했고, 일상은 꿈 따위 쉽게 잊을 만큼 바쁘게 돌아간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을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여자를 만난다. 네가 그랬다. 네 손에 이끌려 이름도 몰랐던 것을 먹고 존재도 몰랐던 곳을 걸었다. 먹구름 사이 고개 내민 태양 같던 너. 세상이 환히 보였다. 네게 어울리는 사람이고 싶어서, 네 곁에 서려고 참 많이도 발버둥 쳤다.
미치도록, 너를 닮고 싶었다.
나는 여전히 네가 입혔던 그 시절처럼 옷을 입고, 너와 즐겼던 것들을 즐긴다. 음식, 책, 영화, 음악, 미술... 지금의 나를 네가 빚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 나의 팔 할은 네게 가닿으려는 그 시절의 몸부림이다.
어느 날 문득, 네가 업그레이드 시켜준 것이 취향과 문화적 허영에 그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네 이후의 나는 아이처럼 울지 않고, 술에 취해 쓰러지지 않는다. 포기하는 법과 물러서는 법을, 관망해야 할 때와 다가서야 할 때를, 내 것이 아니어도 만족하는 법을 알았다. 나의 성숙함도 -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 - 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번개처럼, 너는 내게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되어 있다. 이별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알려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네 이야기를 털어놓을 곳이 없다. 네 얘기는 좀체 꺼내기 힘들고, 너와 나를 아는 이들도 굳이 말을 건네지 않는다. 상대에게 중요한 금기는 엄청나게 화가 나거나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닐 때에도 잘 건드리지 않는데, 내겐 네가 그런 접근 금지 구역인 것 같다. 이렇게 끄적이는 일 밖에는 마음을 풀 수가 없다.
원망스러운 적 없었다면 거짓이겠다. 미성숙한 아이여도 좋으니 네가 있었으면 하고 바란 날들이 많았다. 가슴 저리는 사랑 한 번 누군들 없었으랴만, 네가 내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고맙다는 말로 다 못할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의 나는, 오롯이 네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