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하고, 벌쭘하고, 혹은 황당하고
#상황 1.
문이 열린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2열 뒤에 안면 있는 이가 보인다.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며 내리기 위해 발을 옮기는데, 맨 앞줄에 서있던 사람이 마주 고개를 숙인다. 당황스러우면서 웃기다.
#상황 2.
아는 얼굴이 보인다. 씨익 웃으며 "안녕하세요?" 하고 크게 인사한다. 어쩐지 마주오는 인사가 애매하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 다시 찬찬히 보니 비슷하게 생겼을 뿐 처음 보는 사람이다. 얼굴에 물음표가 선연한 그를 뒤로 하고 걸음을 재게 놀린다.
#상황 3.
점심시간 끝무렵, 엘리베이터 홀에 종종 걸음으로 들어선다. 가득한 사람 사이에 누군가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를 건넨다. 낯선 얼굴이다. 실례가 될까 얼른 마주 목례하고는, 혹시 내 뒤 누군가에게 인사한 게 아닌지 싶어 고개 각도를 그대로 유지하며 핸드폰을 꺼내 내려다 본다. 됐어, 자연스러웠어!
인정한다. 명민했던 10대, 20대는 다 지나가고 이제는 내 머리도 내리막길이다. 디지털 치매도 단단히 한몫이라 - 이건 좀 얘기가 다른가? - 이제 숫자를 외우거나 지하철 노선도를 기억하는 따위의 숨 쉬듯 해내던 일들도 엄연한 두뇌 활동이 되었다. 그래, 그건 나이 듦에 따른 자연 현상이라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완연한 30대가 되기 전부터도 이건 좀 심하다 싶게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 분명히 어디선가 봤는데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알더라? 하는 수준에서 상대는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처음 보는 사람인 수준까지. 아무래도 내 머리 속엔 지우개가 있는게 틀림없다.
더군다나 길을 걸을 땐 시이불견, 무언가를 '보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보니 아는 사람이 지나가도 화들짝 놀라 화답하기에 바쁘다. 먼저 인사하는 일 없는 싸가지 없는 놈으로 소문 나 있더라도 별로 할 말이 없을 정도다. 그런 주제여서인지 아는 얼굴을 먼저 발견하면 이때다 싶어 다가가 의기양양하게 인사를 건네는데, 아니 글쎄 착각해서 생판 모르는 남에게 인사했을 때의 민망함이란.
그런가 하면, 오는 인사라도 잘 답해야겠다 싶어 애매한 인사에도 '저 이도 나처럼 긴가민가 한가 보지.' 생각하며 꼬박꼬박 마주 인사하는데, 절반의 확률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네, 안녕하세요." 라니...... 척추를 타고 뻘쭘함이 흐른다. 사람들과 눈 마주치는 게 곤혹스러울 지경이다.
얼마 전엔 같이 일했던 협력 업체 과장님을 우연히 마주쳐, 역시나 의기양양하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 착각하지 않았다. 상대도 나를 틀림없이 알아보고 마주 인사해왔다. 한참이나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 그런데 고객사 출입증을 하고 계시네요?" 하고 물으니 묘한 표정이 되는 과장님. 아뿔싸, 그 사람이 아니다. 이미지가 비슷한 고객사 담당자였다. 그 순간 찾아온 정적의 무게는... 글로 다 하기가 힘들다. 이런 극적인 착각이라니, 이젠 그냥 심한 수준이 아니라 병이다 싶다.
그래도 혼자는 아닐 거다. 생각해보면 내가 뒷 사람에게 인사하는데 착각하고 마주 인사하는 사람도 심심치 않고, 착각한 내가 다가가 인사해도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할지언정 일단은 답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도 나처럼 '대체 누구지'와 '젠장 쪽팔려'의 사이를 숱하게 오가고 있을 것이다. 나 혼자는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될 대로 돼라 식의 대책 없는 당당함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 퇴근 무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한 여자가 - 솔직히 말하겠다 - 얼굴이 너무 예쁘게 생겼기에 나도 모르게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그만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살짝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에 그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또다시 화들짝 인사했는데, 두 번 세 번 생각해봐도 역시 처음 보는 사람이다. 내가 하도 쳐다보니 아는 사람이 '언제 인사 하나 보자' 하고 지켜보는 줄 알았나 보다. 다시 한번 나 혼자는 아니라고 확신했던 순간. 오늘 이 글이 있게 한 그와 전국 방방곡곡에서 뻘쭘함을 버티고 있을 동지 여러분께 파이팅을 전하고 싶다.
여기는 동방예의지국, 우리는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의 자손들이 아닌가. 민망함과 뻘쭘함을 이겨내고 꿋꿋이 인사를 주고받을 일이다. 다만 조금 모호할 뿐이지 - 보통 그런 순간의 인사말은 명확한 언어가 아니게 마련이다. 이렇게.
"네..안녀...어 ᆼ..ㅎㅅ....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