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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전거 탄 달팽이 Oct 27. 2023

그 사과가 아니라 이 사과란다


A반에 있는 친구들은 대부분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한국에 온 지, 3년이 넘은 친구도 있지만. 2학기부터 시간표가 바뀌어,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에 2시간이다. 그것도 월요일 하루다. 그 시간에는 주로 한국어 단어를 외우거나, 쉬운 내용을 함께 공부한다. 누군가에게는 복습이, 누군가에게는 학습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날은 오랜만의 수업이기도 했고, 단어 시험이 밀려있어, 열심히 단어장을 나눠주고 공부하는 중이었다. 아이들이 3과 단어는 그럭저럭 봤는데, 4과 점수는 형편없이 나와서 다시 공부해 오라고 일러두는 참이었다.


   손가락 4개를 펼치며 4과 단어를 공부해 오라고 강조하는 중이었다. 저쪽 한구석에 앉은 녀석이 그런다.

“яблоко(야블루까, 러시아어 사과).”

“아니요. 먹는 사과가 아니에요. 4과 단어를 외우세요. (손가락 4개를 펼쳐서 강조하며)”

“яблоко.”

“그 사과가 아니라 이 4과예요.”

“яблоко. яблоко.”

“시험을 볼 거예요. 단어를 외우세요.”



   더 이상 ‘4과’를 언급하지 않고, 말을 마친다. 녀석은 분명 지금 간을 보고 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녀석이다. 첫인상과 달리, 장난기가 많고, 평소 러시아어 욕을 많이 한다고 한다. 지난번에 한국어 게임을 하다가 러시아어로 욕을 했다. 알아들은 내가 “나쁜 말 하면 안 돼요!”라고 했더니, 화들짝 놀랐다.


   그 이후로 조심하는 듯했는데, 오늘따라 저런다. 그러니까 저 녀석은 내가 러시아어를 어디까지 아는지 시험을 하는 거다. 이 말을 알까 모를까, 이렇게. 뭐, 한국의 중학생들도 입에 욕을 달고 사니,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불리할 때만, 그것도 러시아어를 잘 모르는 사람 앞에서만, 그러니 기분이 썩 좋진 않다.


   어느 순간부터 러시아어 욕을 좀 배웠다. 정확히 말하면 소리를 배웠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아예 모르면 욕인지 뭔지 모르니 기분도 나쁘지 않을 텐데, 뭘 배우기까지 하나 싶을 수도 있겠다. 아이들 사이에서 욕이 오고 가면 학교 폭력이다. 한국 선생님에게 너무 뻔뻔하게 욕을 해대면 그건 교권 침해다. 이걸 파악해야 하니, 굳이 배웠다.


   아는 게 병이라고 했던가. 모르면 좋았을 욕을 알게 되니, 귀가 피곤해진다. 마음이 따가워진다. 결국 사람인지라, 가끔은 아이들이 미워질 때도 있다. 감탄사처럼 욕을 하는 아이도, 한숨을 내쉬듯 욕을 하는 아이도 많다. 얼마나 쌓인 게 많으면 저럴까, 싶다. 그렇다고 어지간한 아이가 아닌 이상, 한국 아이들은 그러지 않는다. 어쩔 수 없지만, 제재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그래 욕이 아니었으니, 야블루까를 넘기려 한다. 가슴 한편에서 아니 그럼, 왜 извиняться(이즈비니째, 러시아어로 미안하다는 의미)를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만. 에효~ 그냥, 이 사과든, 저 사과든, 그 사과든 ‘4과’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던 것으로 마무리 지어야겠다. 그러니 월요일에 일단 시험은 보는 걸로.          

   

#쓰고뱉다

#100일의글쓰기시즌2

#쉰세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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