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에 말숙이는 기타 연주를 잘하는 남자 친구에게 반해, 결혼을 했더랬어요. 남자 친구의 목소리는 그윽했고, 고동색을 띠고 있었거든요. 그 고동색 목소리로 기타를 연주하며, 생일선물로 노래를 불러주는 남자 친구는 말숙이의 남편이 되었지요. 그래요, 어쩌면 모든 게 다 기타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기타를 멋들어지게 연주하던 남편은 결혼하자마자, 기타는 손에 들지도 않았어요. 말숙이도 그걸 원했거든요. 기타 대신,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아이를 한 번 더 들어주길 원했지요. 그래서 말숙이는 ‘기타’란 늘 아웃 오브 안중,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기타는 그렇게 한구석에 처박혀 버렸어요.
강사 계약서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말숙이는 강사의 담당업무 ‘라’항에 ‘근무학교 기관장이 지정하는 기타 업무 수행’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어요. 남편의 기타처럼 아웃 오브 안중인, 개의치 않아도 될 사항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단단한 착각이었지만요.
‘기타 업무 수행’이란 여섯 글자에 담긴 일은 정말 많았어요. 가, 나, 다에 있는 일은 물론, 말숙이가 해야 할 일은 수시로 빙하톡을 타고 내려왔어요. 둘리도 아닌데 말이죠.
시정표가 변경되었습니다, 시간표를 다시 짜 주세요.
교재 및 필요물품 품의 올리세요.
문제 있는 아이 보냅니다, 데리고 있으세요.
교육청 보고서 작성 부탁드립니다.
장학사님 오십니다, 연구수업 준비하세요.
감사에 대비하기 위한, 학생별 포트폴리오 제작 바랍니다.
방학특강 계획서 및 예산 작성 부탁드립니다.
사실, 말숙이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에 14시간, 월 59시간밖에 없었어요. 그 이상은 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가 없었거든요. 말숙이는 그 14시간 동안 수업도 하고, 학습지도 만드느라 바빴어요. 아니 시간이 턱없이 모자라서 밤을 새야 했지만, 빙하톡을 타고 내려오는 각종 업무도 해내야 했어요.
밥도 못 먹고, 빙하톡을 타고 내려온 기타 업무를 처리하고 말숙이는 집에 돌아왔어요. 말숙이는 피곤함에 절여진 파김치가 되어버렸지요. 하지만, 아직 못다 마친 업무가 있었어요. 당장 내일부터 시간표가 바뀌어서, 각종 안내문과 가정통신문을 작성해야 해요. 지친 몸을 이끌고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요.
문득, 방 한구석에 놓인 남편의 기타가 보이네요. 어쩐지 방 한구석에 놓인 남편의 기타가 미워 보여요. 같은 기타라서 그런가 봐요. 기타를 발로 한번 걷어차 봐요. 기타가 우뎅뎅그랭 텅하며 쓰러져요. 말숙이가 진짜로 걷어차고 싶었던 건, 계약서 속 ‘라’ 항의 기타지만, 어쩌겠어요. 그 기타를 발로 차면, 통장이 텅장이 되는 소리만 들릴 뿐인걸요.
널브러진 기타를 다시 바로 세우며 말숙이는 생각해요. 아, 앞으로는 꼭 기타를 잘 봐야겠다고, 기타를 조심해야겠다고 말이죠. 여러분도 계약서를 앞에 둔 을이 되면, 꼭 기억하기로 해요. 기타를 조심해야 한다는 걸. 여러분, 기타를 조심하세요!
오늘의 동화 끝.
내일은 ‘쓰는 인간’님의 잔혹동화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