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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전거 탄 달팽이 Oct 06. 2021

100장부터는 행정실에 문의하세요

아껴야 잘 살죠(2)

옛날 옛날, 말희는 여전히 은혜 풍 씨가 풍성한 씨족 학교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이전 이야기는 여기를 참고하세요.​) 말희는 고2 문학을 주로 가르쳤어요. 말희는 처음에 학교에서도 문제집으로 수업을 하는 게 참 신기했고, 좋았어요.


   말희는 대학생 때부터 학원에서 강사로 일했어요. 학원에선 문제집으로 수업을 하니깐, 말희에게는 교과서보다 문제집이 더 익숙했지요. 그래서 문제집으로 문학 수업을 한다기에 참 좋았어요. 그렇지만 이내 문제가 생겼어요.


   지 부장님이 선택한 문제집에는 정말 문제만 있었어요. 다양한 설명과 개념이 담긴 문제집도 많은데, 이 문제집은 어찌 된 일인지 수능 문제집처럼 딱 문제만 있었어요. 이것으로 진도를 나가니 당연히 중간·기말고사도 출제해야 하는데, 문제만 덜렁 있으니 말희는 난감해졌어요.

EBS 수능특강 연계 기출 고전 시가·현대시 (2021년) _ 알라딘


   고심 끝에 말희는 학습지를 만들기로 했어요.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잠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학습지를 만들었어요. 코피가 팡팡 터질 지경이었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고, 시간과 영혼을 갈아 넣은 학습지를 만들었어요.


   아뿔싸, 이게 뭔 일인가요. 말희가 학습지를 교무실에서 신나게 출력해서 아이들에게 나눠준 다음이었어요. 교직원 회의 시간에 갑자기 지 부장님이 마이크를 잡고 그랬어요.


에-. 교무실에서 학습지 프린트하지 마세요. 종이를 아껴야 합니다. 100장 이상은 각 과목 부장님께 사유서를 제출하세요. 부장님의 사인을 받으면, 행정실장님께 사유서와 학습지를 제출하시고, 사인받아서 인쇄실에 맡기세요.”


   그래요, 지 부장의 말은 정확히 말희를 가리켰어요. 보통 문제집 한 지문에 시는 3편 정도가 나와요. 선택지에 제시되는 시나 고전시가까지 더하면 10편 가까이 될 때도 있어요. 기본적인 개념들과 각 시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까지 곁들인 학습지는 족히 너덧 장은 되었어요. 말희가 들어가는 고2 문학 수업은 총 3반, 한 반에 30명이 좀 넘으니, 당연히 100장이 훌쩍 넘어가는 거죠.


   종이를 아껴야 한다는데, 지구를 위해 그래야 한다는데, 말희는 지구인으로서 할 말이 없어졌어요. 밤새 만든 학습지와 구구절절 쓴 사유서를 들고 국어과 부장님께 갔어요. 다행히 국어과 부장님은 우아한 부장님이세요. 우아한 부장님은 말희에게 수고한다며 얼른 사인해 주셨어요.


   이제 다음은 행정실장님이에요. 이사장실 옆에 있는 행정실장님 방으로 향해 봐요. 말희에겐 너무 어려운 분이에요. 한참을 말희의 학습지를 들여다보던 실장님이 그러세요.


김 선생, 이게 최선입니까? 더 못 줄입니까? 요즘 종잇값이 얼마나 비싼 줄 아세요? 아껴야 잘 삽니다. 다음부턴 주의하세요.”


   아. 이제 학습지는 물 건너간 거 같아요. 털레털레 운동장 끝에 있는 인쇄실로 향해 봐요. 인쇄실장님도 은혜 풍 씨예요. 인쇄실장님이 또 그러세요.


가뜩이나 할 일도 많은데... 이거 급해요? 뭐가 이리 많아.”


   어쩐지 지구에서 제일 못 된, 종이를 미친 듯이 낭비하는 낭비녀로 찍힌 느낌이에요. 어렵사리 학습지 인쇄를 맡기고 교무실로 향하면서 말희는 다짐해요. 학습지 대신, 판서를 해야겠다고. 그렇게 지구인으로서 종이를 아껴야겠다고.


   종이 대신, 판서 시간과 분필과, 말희의 팔이 낭비되겠지만,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요. 지구를 위해서, 지구인인 우리는 종이를 아껴야 하는 존재인걸요. 여러분, 우리 모두 종이를 아껴야 해요, 그래야 잘 산답니다. 오늘의 동화 끝.






내일은 ‘쓰는 인간’님의 비정규직  잔혹동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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