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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전거 탄 달팽이 Aug 23. 2021

염소불고기에선 용비어천가 맛이 난다.

신학생인 남편과 사귈 때였다. 교제 기간도 꽤 되었고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갔다. 사진 씨가 우리 남편을 호출했다.


   아직 서울로 학교에 다닐 때인 데다 주말에도 교회 일로 바빠서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사람을 호출이라니. 일단 짜증부터 났다. 게다가 사진 씨는 늘 술에 취해있었다. 사진 씨의 술주정을 받아주는 건 나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사진 씨는 나또 형제와 나를 염소 고깃집으로 데려갔다. 먹는 거에 관해선 곱게 자란 나또 형제가 난감해했다. 순댓국도 나랑 사귀면서 처음 먹어봤는데, 염소탕이라니 큰일 났다.


   교외에 있는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염소탕집이었다. 겉보기엔 숯불갈비 집 느낌이었다. 사진 씨는 이미 술에 조금 취해있었다.

 

   숯과 불판이 들어왔다. 어, 사진 씨가 나또 형제, 염소탕 못 먹는 걸 아나, 이 집에 다른 메뉴가 있었나.


   사진 씨가 주문한 건 염소 불고기였다. 염소 생고기에 살짝 양념하여 숯불에 구워 먹는 요리였다. 사진 씨와 성심 씨와 살며 다양한 음식을 먹어본 나도 처음 보는 요리였다.


   치익-. 염소 고기가 불판에서 익어간다. 사진 씨의 말도 길어진다. 나또 형제에게 뭐라 뭐라 한다.


   끝없는 이야기가 계속되는 중에 나또 형제에게 사진 씨가 말한다.



자네, 내 딸 데리고 갈 거면 각오를 써 오시게. 용비어천가 형식으로,
내 딸 데리고 가는 각오를 써 와.
다음 주까지.”



   용비어천가라니. 국문학을 전공한 딸 앞에서 사진 씨가 용비어천가를 논한다. 아빤 용비어천가가 뭔지 아냐며 거센 항의를 한다. ‘비 콰이어트!’란 무안만 돌아온다. 용비어천가에 비 콰이어트라니.


   결국 나또 씨가 사진 씨에게 뭔가를 써 오긴 했다. 사진 씨가 혼자 읽고 보여주지 않았다. 남편이 된 나또 형제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단다. 진짜 용비어천가 형식으로 썼냐 물었더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그냥 편지를 썼다고 한다.


   사진 씨는 나또 형제에게 왜 하필 용비어천가 형식으로 글을 써오라고 했을까. 내가 사진 씨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 사진 씨는 나 보러, 너는 국문과가 그것도 모르냐고 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생각이 났다. 힘든 목회자 길 가운데, 사랑하는 딸의 안녕과 축복을 바라며, 이 아이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냐는 아버지의 물음이었던 거겠지.


   나또 형제의 편지보다 삶이 대답이 되었나 보다. 사진 씨는 죽음을 앞두고 사위를 불러, 딸과 장모를 부탁했다. 자네가 두 사람 잘 보살펴달라고.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아파트 복도에서 나또 형제에게 부탁했단다.


   지금도 가끔, 춘천에 가서, 그 염소고기 집 근처를 지날 즈음이면 남편과 나는 사진 씨와 용비어천가를 떠올린다. 용비어천가에선 염소 불고기 냄새가 난다. 맛이 난다. 사진 씨의 마음 맛이 난다.


좌: 사진 씨의 젊은 시절. (직장이었던 경찰서) 우: 사진 씨와 사진씨가 나또 형제에게 부탁한 성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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