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대본집 리뷰: 스포 있음
혜자 (Na)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가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눈이 부시게’ 대본집 2권 에피소드 12 中 p333
시간을 완벽하게 주무르던 혜자였다. 스물다섯의 아나운서 지망생인 그녀는 바닷가에서 우연히 주운 손목시계를 돌려, 자기가 되돌리고 싶은 순간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침에 5분 더 자기 위해, 쪽지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시간을 돌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곤 했다. 물론 그렇게 시간을 돌린 대가로 그녀에게만 시간이 다소 빨리 지나가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말이다.
부작용을 깨닫고 시간 돌리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 혜자가 다시 시간을 돌리게 된 건, 택시 운전을 하시던 아버지의 사고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고를 막을 때까지 끊임없이 시간을 돌려, 아버지를 살리는 데 성공한다. 다만, 스물다섯의 혜자가 여든이 다 되어가는 노인의 모습으로 변해버렸을 뿐.
전체 12부작인 이 작품에서 2부 중반에 늙어버린 혜자의 이야기는 10부까지도 계속된다. 마음도 행동도 모두 스물다섯인데, 몸만 여든이 된 혜자를 둘러싼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몸이 늙어버리기 전, 썸남이던 준하와의 인연도 계속되고, 흔히 노치원(노인 분들이 다니는 유치원이란 의미)이라 불리는 홍보관을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들도 계속된다.
혜자와 함께 홍보관에 다니며, 혜자와 함께 늘 꼿꼿함을 유지했던 샤넬 할머니는, 남편과 신혼여행을 갔던 프라하를 떠올리며 집도 없이 프라하 모텔에서 장기 투숙 중이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줄 알았던 자식이, 실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샤넬 할머니는 자살한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홍보관 직원이었던 혜자의 썸남 준하는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고, 또 다른 홍보관 직원은 효도관광을 계획, 일부러 사고를 내어 노인들을 죽게 만들고 본인이 노인들의 보험금을 가로채려는 계획을 세운다. 썸남인 준하도 구출해야 하고, 그들의 계획도 엉망으로 만들기 위해, 혜자를 비롯한 노인들은 탈주 계획을 세운다.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본인들만의 방식으로 탈주에 성공한 노인들은 바다에 다다른다.
해 질 녘 바닷가에 선 노인들의 젊었을 적, 사진이 오버랩되고, 어쩌다가 다른 사람 손에 가 있던 시계를 다시금 손에 쥐게 된 혜자와 함께 화면은 급격하게 변한다.
[효도원 노인들이 이준하를 탈출시키고, 바닷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시계 할아버지는 혜자에게 시계를 건네고, 혜자는 시계 뒷면에 이니셜을 확인하게 된다. (중략)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준하도, 노벤저스도 아무도 없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듯하다. (중략) 화면이 점점 빠르게 흘러가다가 녹아 없어지며 (F.O)
(중략)
혜자 (Na) 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꾸는 건지…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꾸는 건지…
(중략)
혜자 (Na) 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혜자의 모습 클로즈업되면서 엔딩
- ‘눈이 부시게’ 대본집 2권 에피소드 10 中 p231. - ]
그랬다. 여태까지 우리는 이 드라마가 타임슬립이나 타임워프 등의 기능으로 인해, 빨리 늙어버린 여자주인공과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자주인공의 로맨틱 코미디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모든 건 알츠하이머에 걸린 혜자의 눈으로 바라본, 아니 어쩌면 혜자의 상상일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작가는 이 드라마를 통해, 같은 시간을 살아가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지닌 그들을 통해 시간의 의미를 다시 그려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시간 속에는 아픔과 후회가 가득하다. 다리가 다친 아들을 품어주지 못한 죄책감, 자신이 운영하던 미용실을 물려받은 며느리를 향한 미안함, 그저 유골로 돌아온 남편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무력감을 혜자는 또 다른 현실 속에서 풀어보고자 했다. 알츠하이머란 시계를 갖고.
어쩌면 우리는 혜자처럼 늘 시간을 돌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고, 아파하느라 시간을 돌려버리다가 부서져 버린 시계처럼, 시간을 부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안에서 찬란하게, 무엇보다 눈이 부시게 빛나는 시간을 보지 못한 채, 이미 빛을 잃고 지나버린 시간의 껍데기만 쥐고서 말이다.
알츠하이머란 시계로 자신의 부서진 시간을 되돌렸던 혜자. 그녀는 결국 그 부서진 시간을 진정으로 눈이 부셨던 보통의 날들과 지극히도 병약한 지금의 시간으로 치유하게 된다. 그렇게 부서지고 이지러진 시계를 손에 쥔 혜자는 이제 우리에게 말한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말고, 오늘을 살아가라고. 눈이 부시게-. 그렇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노라고 말이다.
지나온 시간으로 인해, 지금의 시간을 부수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이 서 있는 곳은 지금 여기 이곳이다. 그리고 이곳의 시간은 빛나고 있다. 언제나, 늘, 한결같이, 눈이 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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