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느 한끼

쓸쓸

오늘의 한 끼 : 스콘과 아이스 돌체 라테

by 여느진

2020년 11월 19일, 오후 8시 29분


잠에 들었다 깨기를 몇 번, 아주 짧은 단편 영화를 수 편쯤 본 것처럼 짧은 꿈을 여럿 꿨다가 완전히 눈을 떴는데 집 안에 아무도 없었다. 오전까지 내리던 비는 그쳤고, 그 여파로 흐린 바깥의 적막이 집 안에도 그대로 고였다. 식탁 위에 동생이 커피를 타마시고 놔둔 듯 얼룩 묻은 컵이 내가 몸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소란스러움을 짐작하게 했다.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하루의 시간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어쩐지 조금 쓸쓸했다.


택시를 탔다. 새로운 어플을 이용해봤고, 집을 나서기 전부터 내 주변을 휘감은 쓸쓸함의 여운을 좀 더 즐기고 싶어 '조용히 가기'를 눌렀다. 평소처럼 택시에 타며 인사를 드렸고, 그 인사가 한담의 발화점이 된 모양이다. 조용히 노래를 들으며 창 밖을 바라보는 중간중간 말을 걸어오는 기사님 덕에 출근길 명상은 쉼표가 여럿 찍혔다.


일을 할 때도 비슷했다. 차분하고 고요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물건을 자주 떨어트리고 웃긴 일이 많이 생겨서 오히려 평소보다 더 산만하고 시끄러웠다. 일이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데, 시끌벅쩍한 소리로 꽉 찼던 곳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집을 나오기 전에 느꼈던 쓸쓸함이 다시 내 주변에 고여 들기 시작했다.


할 일이 남아 카페에 들렀다. 샌드위치를 먹고 싶었는데, 시간이 조금 늦어서인지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고민하다 스콘을 시켰다. 예전에 즐겨먹던 돌체 라테도 함께. 사실 나는 먹는 걸 좋아하지만 음식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그니까 빵의 풍미가 어떻고, 질감이 어떻고 하는 품평을 내리지 못한다. 그저 맛있으면 그만이다. 스콘을 고른 것도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맛이 세 가지길래 궁금해서였다. 크랜베리와 치즈, 헤이즐넛 초콜릿. 각각의 맛 중 뭐가 더 풍부하고 이런 걸 얘기할 순 없지만, 셋 다 퍽퍽했고 적당히 달았고 맛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돌체 라테도 시원했고, 언제나처럼 달았고, 우유를 두유로 변경했더니 끝 맛에 두유 특유의 향이 올라왔다.


사실 스콘을 한 입을 처음 베어 물었을 때 당황했다.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린 잔해의 범위가 너무 넓어서. 내가 앉은 매장 일층엔 직원분들과 나뿐. 넓은 테이블에 놓인 자료와 너저분한 가루의 흔적들, 그리고 나. 머릿속으로는 내가 느낀 맛에 대한 묘사로 시끌하고, 테이블은 내 한 입의 결과로 가득한데. 결국 이 모든 걸 보는 건 나 하나. 가루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는데, 일행과 들어오는 사람들을 목도했다. 나의 소란함이 또 쓸쓸함으로 바뀌었다. 수분기 하나 없이 메마른 스콘의 식감이 내 온몸에 퍼지기라도 한 것처럼. 라테라도 따뜻한 걸 마셨으면 조금 더 나았을까.


낮보다 훨씬 더 차가운 바람이 퇴근길에 동행했다. 걸음마다 은행잎이 수북하게 쌓여있었고, 위를 올려다보면 휑했다. 이전엔 노란 차양막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던 하늘의 모습이 선명하다. 밤하늘은 새까맣지 않고 의외로 밝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남색 물감을 다 쓰고 나서 붓을 씻은 물처럼 흐리고 농도가 옅은 오늘의 하늘. 무거운 잎을 잔뜩 이고 있다가 내려놓은 나뭇가지들이 가벼워 보인다. 내가 느낀 오늘의 쓸쓸함은 가벼움을 향해 가는 길목인 건가.


'쓸쓸'을 마음속에 반복해서 적어내리다가 문득 위에 놓인 쌍시옷들이 ^^표시 같다고 느껴진다. 오늘을 이루는 글자, 늘에 ^^을 얹어놓은 것 같다. 결국 쓸쓸은 웃음이 숨어있는 단어. 내가 오늘 이 느낌 위로 지었던 웃음들이 떠오른다. 사회에서 만드는 웃음들은 이렇게 쓴 맛인 건가. 나는 그럼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날 동안 쓴 ^^들을 만들어야 할까. 집에 와 야식으로 먹는 라면조차 싱겁고 맛없는,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오늘, 이 위에 ^^을 얹으며 생각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