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 끼 : 불고기 피자
2020년 11월 20일, 오후 8시 59분
어제처럼 적막한 집에서 눈떴다. 홀로 새우를 쫑쫑 썰어 넣은 김치볶음밥을 해 먹었는데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갑자기 버겁게 느껴졌다. 지금 돌아보면 조금 우습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쉼표를 그릴 순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런 내게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처방전은 택시 타고 출근하기. 오롯이 나를 위해 움직이는 공간 안에서 내가 원하는 배경음악을 고르고 마음껏 생각할 수 있는 특권을 선물한다.
한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쌓이는 이야기의 높이가 점점 높아진다.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가장 화나고 가장 크게 웃고. 내 하루가 써 내려가는 이야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 직장. 이 공간에 대한 고민이 늘어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시간의 산물일까. 갈수록 깊어지는 고민의 끝을 좀처럼 가늠하기 어렵다.
새하얀 롱 패딩을 처음으로 꺼내 입었다. 부러 사이즈를 큰 것으로 구매한 탓에 발목 위로 간신히 올라오는 길이. 입으면 거대한 북극곰이 된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딱 그만큼 오늘 참 추웠다. 자꾸만 마음에 신물처럼 올라오는 차가운 느낌을 바람을 막아내는 롱 패딩처럼 대신 맞아주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는데.
집에 가며 피자를 주문했다.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이 없다면, 그리고 정해진 메뉴가 없다면 퇴근길 발걸음이 무거운 날에는 주로 간식을 사 가거나 배달음식을 시킨다. 오늘의 피자도 비슷한 이유.
어릴 적엔 불고기 피자가 피자의 전부인 줄 알았다. 집에서 먹는 피자는 늘 불고기 피자였고, 자연스럽게 불고기 피자맛이 피자맛의 기준이 됐다. 이제 나는 다양한 피자 종류를 알고, 각각의 맛도 알고, 비슷한 듯 다른 피자 맛에 대한 호불호가 생겼지만. 대부분 감자가 들어간 것이나 매콤한 피자를 시키는 편이라 불고기 피자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역시 기억하는 맛 그대로 특유의 감칠맛과 달달한 고기의 맛. 막상 피자보단 주변에 놓인 오븐 스파게티나 핫윙, 마약 옥수수를 더 많이 집어먹었지만, 기억 속 익숙한 맛이 주는 안정감은 생각보다 컸다. 비로소 오늘 내가 일이 다 끝났고, 익숙한 공간 속에 들어왔다는 증거 같았다.
나 대신 열심히 피자를 한 조각씩 해치우는 엄마를 보며 엄마가 때로 사 오던 군고구마나 찹쌀도넛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엄마의 퇴근길도 이랬을까. 내일 내가 집에 들어올 때는 손이 가벼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