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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느 한끼

대나무 숲 비우기

오늘의 한 끼 : 비빔밥

by 여느진

2020년 11월 24일, 오후 9시 8분


마음이 참 수선했던 하루. 뜻밖의 소식에 마음 한편이 하루 종일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려야 했다. 이런 마음이 바깥으로 나왔는지 여기저기 부딪히고 사건사고가 많았다. 집에 나갈 땐 없던 오른쪽 손목의 작은 멍자국이 이런 하루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물.


잘 챙겨 먹자 했지만, 오늘은 정말 시간이 빠듯해서 커피 한 잔만 마시고 출근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신없는 하루는 배고픔을 느낄 아주 약간의 시간도 주지 않았다. 덕분에 집에 도착해서야 허기짐이 밀려왔다.


조금 웃기지만 비빔밥은 허기짐과 참 잘 어울리는 메뉴다. 특히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나물과 밥, 고추장을 마음 가는 대로 넣고 마구 비벼서 한 입 크게 먹는 모습이 그렇다. 일단 비비고 맵거나 짜면 나물이나 밥을 더 넣고, 싱거우면 고추장을 더 넣으면 된다. 실패할까 두렵지 않다. 오늘같이 정신없거나 스트레스받는 날에는 재료를 마구잡이로 헤집으며 화풀이를 대신하기도 한다. 식탁 위의 작은 대나무 숲 같다.


오늘 내 대나무 숲에는 무생채와 시금치나물, 콩나물무침, 고구마순 무침, 그리고 계란 프라이가 들어갔다. 비빔밥을 즐기는 우릴 위해 엄마가 구비해준 나무 숟가락으로 사정없이 섞고 나면 그 모습이 참혹하다. 그리고 그 잔해에서 내 모습을 찾게 된다. 세상이 휘두르는 숟가락을 열심히 피해봤지만 결국 너덜너덜해진 내 모습을.


내가 느낀 감정의 크기만큼 짙어지는 내 작은 대나무 숲의 붉기. 새빨간 비빔밥을 입에 밀어 넣을 때마다 얹혀있던 무언가가 같이 내려가는 기분이다.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편안한 잠옷을 입고, 티브이 앞에서 편안하게 앉아 그릇을 긁어가며 먹는 시간이 작은 위안이 된다. 그릇이 비어갈수록 속도 비어 간다. 부른 배에 역설적인 비움이 참 다행이다.


다음 달 오늘은 크리스마스 전 날. 다음 달 24일, 이 시간의 나는 내일을 기대하고 있을까, 아니면 오늘처럼 지친 하루를 복기하며 한탄하고 있을까. 뭐가됐든 가장 편안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내일은 크리스마스같이 선물 같은 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한 달 후 내게 미리 전하는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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