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음료 : 오렌지주스
2020년 11월 23일, 오전 4시 7분
커피 두 잔과 밀크티 한 잔은 새벽녘에도 내 눈이 말똥말똥 빛나게 만들었다. 책을 몇 장 읽다 보니 출출해져 매운 볶음 컵라면을 먹으며 오렌지주스를 두 잔이나 비워냈다. 늦은 시간이고, 몸에 좋지 않은 행동임을 알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원래 몸에 나쁜 자세가 가장 편한 법이고, 몸에 해로운 음식이 가장 맛있는 법이니까. 모두가 잠든 시간, 나에겐 몸에는 해로워도 마음이 풍족해지는 약이 필요했을 뿐이다.
용량이 제법 큰 오렌지주스를 구매했던 것 같은데, 이틀 정도의 시간만이 지났는데도 벌써 한 통을 다 비워냈다. 방금 또 주문했다. 이렇게 특정한 음료나 음식이 계속 당기는 때가 있다. 수능이 끝나고 난 후에도 이렇게 오렌지주스에 빠져있었는데. 그때도 지금과 비슷하게 추웠었다. 늘어지게 잠에 빠져 살다가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욕에 별안간 불타올랐었다.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당시의 내가 블로그에 남겨둔 글 덕분에.
어렸을 적 취향이 시간이 지나며 바뀌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매운 음식을 먹지 못했는데, 이젠 매운 음식이 아니면 안 된다든지와 같은. 그때도 지금도 나는 무언가를 기록하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 특히 내 하루를. 그래서 내방엔 다이어리가 몇 개씩 보이고, 블로그에는 중학교 3학년 꼬맹이 시절부터 고3까지 썼던 짧은 독후감이나 당시 좋아했던 아이에 대한 이야기나 일상이 아주 조금 남아있다. 지금의 내가 여느 날들, 여느 순간들, 여느 음식들에 하나하나 의미 부여하고, 기록하는 일은 그때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나의 취향인 셈이다.
오렌지주스도 내가 기억하는 한 항상 맛이 비슷하다. 적당히 상큼하고 적당히 달달한. 색도 늘 비슷하다. 샛노랗거나 조금 더 짙은 노란색. 그래서 실망하는 일도 없다. 나는 기록하기를 좋아하지만, 끝맺음은 서툰 편이다. 그래서 집에 있는 많은 다이어리가 앞부분만 열심히 채워져 있고, 뒷부분은 비워져 있다. 쉽게 무언가에 흥미를 잃어서 중간에 그냥 다이어리를 바꾼 것도 있다. 역시 뒷부분은 비워져 있다.
사진으로 기록된 과거와 글로 기록된 과거를 미래에 들춰보는 일은 제법 재밌다. 블로그 속 남겨져있는 글도, 다이어리에 담긴 글도 당시의 나를 온전하게 담아내진 못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했고 이런 일상을 보냈구나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때에도 지금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하지만 도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들. 오렌지주스를 하루에 한 병씩 비워낸 것과 같은 것들.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는 친구네서 밤새 놀던 그런 것들.
변화를 고민하는 지금의 나와, 변화를 고민했던 과거의 나. 그때도 지금도 난 여전히 변화를 원하면서도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수능은 수능이고, 이미 끝나버린 일에 마음 담아두기보다는 일단 나 자신을 가꿔야겠다. 어느 대학을 가게 되건 간에 대학을 간 이후의 내가 얼마나 능력을 갖추냐가 중요하니까^^'라는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변화와 변화와 변화. 이 틈 사이에서 변함없는 건 여전히 난 기록한다는 것과 오렌지주스의 맛. 완벽히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하게 남아있는 것이 주는 안정감은 생각보다 크다. 오렌지주스를 한 잔 더 비우고 싶은데, 지금은 텅 빈 주스병만 남아있다. 커피나 한 잔 더 타마실까 고민하며, 2012년 12월 5일의 내가 새벽에 하루를 정리하며 마지막에 적어둔 말을 본다.
'오늘도 좋은 하루였다 :> 내일도 그다음 날도 좋은 하루가 올 거다!'
어쩌면 지금의 내게, 과거의 내가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