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후식_치즈스틱과 오렌지주스
2020년 11월 25일, 오후 11시 51분
배부르게 먹어도 뭔가 모자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제 난 비빔밥을 양푼에 가득 비벼 먹었고, 분명 배부르다고 생각했지만 후식이 먹고 싶었다. 이럴 때 나는 대게 내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는 편이다. 입 짧은 내가 계속해서 먹고 싶어 하는 일은 드물기도 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에게 약하기 때문이다.
치즈스틱을 나 자신에게 허락한 건 나였지만, 튀겨준 건 엄마였다. 노트북을 두드리며 바삭한 튀김옷 속에서 길게 이어지는 치즈를 끊어먹었다. 내가 끊고 있는 게 질기게 이어지는 일더미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중간중간 오렌지주스를 넘기며 생각했다.
치즈스틱은 튀기기 전엔 항상 튀김옷 안 가득히 치즈가 차있는데, 기름에 빠졌다가 나오면 틈이 생긴다. 고체가 액체 비슷한 것으로 바뀌며 생기는, 그니까 열을 견디어내며 생기는 틈이. 이렇게 생긴 틈은 엄마가 나를 위해 기꺼이 감수한 수고로움과 새벽까지 이어질 할 일과 얼음과 섞이며 점점 옅어지는 오렌지주스의 향과 노트북 소리로 채워진다.
바쁠수록, 일상이 나를 튀겨낼수록 내 틈은 점점 사라지던데. 치즈스틱의 단면에서 보이는 빈 공간을 보며 생각했다.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밀어 넣었을 때는 이미 요일이 바뀐 후였다. 하루의 마지막과 시작점을 모두 일하면서 보냈구나, 생각하니 묘해졌다.
사실 틈이 생겨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바쁘면 틈에 대처하는 법을 까먹게 된다. 몸에 자질구레하게 생기는 생채기를 나중에서야 깨닫는 것도, 상처를 인지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실수할 때에야 잠깐의 틈이 생기지만 그때는 당혹스러움으로 금방 채워지니까. 요즘의 내가 나를 알아차릴 틈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 같은 것을 느끼는 건 나조차 나 자신을 돌보지 않음을 느껴서일까.
벌어진 손가락 위 작은 생채기 틈이 갑자기 신경 쓰인다. 아픈 만큼 생기는 것이 틈이라면, 그 틈을 다시 채우는 건 더 단단해진 살일까 아니면 고통에 대한 기억일까. 틈이 생겨야 좋은 건지, 아니면 없어야 좋은 건지 무게를 재보려 해도 영 감이 오질 않는다. 뭐가 됐든 지금의 내가 좀 더 웃으면 좋겠다는 것뿐.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내게 치맥의 틈을 선물하기로 했다. 아주 늦은 퇴근길 버스 안에서, 동생에게 당당하게 내가 살게라고 말하고 배달어플로 치킨을 시킬 수 있는, 그런 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