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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느 한끼

불만족스러운 생일

과거의 한 끼_보쌈

by 여느진

2020년 2월 24일, 오후 8시 2분


내 일주일은 많이 힘든 날과 그냥 힘든 날들로 이뤄져 있다. 오늘은 둘 중에 많이 힘든 날. 한 해 살이가 또 저물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힘든 날들에 대처하는 일이 서툴다. 뭐든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몸에 익는데, 사는 일은 왜 매번 어려울까. 내 전공이 아닌 다른 전공책을 눈 앞에 펼쳐둔 기분이다. 그니까 힘든 일은 내 전공이 아니라는 소리다.


어제처럼 적막한 거리. 불 꺼져 있는 마트. 크게 흘러나오는 이어폰 속 노래. 어제랑 비슷하네. 아니, 그래도 어제보단 조금 나은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며 부러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다. 배고프니까 집 가자마자 뭐라도 먹어야지. 아까 낮에는 대강 때웠으니까 정말 맛있는 걸 먹을 거야. 오늘 시험 끝난 애들에게 보낸 기프티콘은 마음에 들었을까. 딸기 라테 맛있는데. 갈비 먹고 싶다. 의식이 마음껏 흘러가게 두었다.


집에 오자마자 밥을 먹지 못했다. 기분은 더 아래로 가라앉았고, 배고팠다. 만족하기가 목표인 내게, 하루 종일 퇴근의 순간만 기다려온 내게, 이런 불만족스러운 순간이 주는 파괴력은 컸다. 나를 부수고, 주변을 부수고. 나중에 부서져 내린 조각을 정리하다 손이 찔리지 않았으면 하고 무기력하게 소망할 수밖에 없는.


이렇게 고된 날이면 가끔 생일을 떠올린다. 오늘도 마찬가지. 올해 생일엔 무얼 먹었었지, 돌아보니 보쌈. 사실 나는 족발을 더 좋아한다. 그럼에도 생일에 보쌈을 먹은 건 아마 엄마에게 물었을 때 답변이 보쌈이었기 때문이겠지. 언제나 내 만족을 조금 덜어내고 타인의 만족으로 채워왔다는 사실이 새삼 와 닿는다. 누군가의 만족을 위해 나를 갈아 넣는 일. 이것도 결국은 직업병일까.


그래도 보쌈은 맛있었다. 갑작스러운 재택근무 전환으로 오롯이 집에서만 축하 메시지를 받으며, 조금 퍽퍽하지만 겨자소스와 함께 먹으면 촉촉하고 코끝이 찡해지는 보쌈을 먹으며 나쁘지 않은 생일을 보냈다. 미역국도 없었고, 케이크도 없었고, 너무 평범해서 차라리 마음이 편안했던. 불만족이 주는 만족이란 모순을 잔뜩 느꼈던, 그런 생일.


이젠 올해의 생일보다 내년의 생일이 더 가까워졌다. 내년 생일도 난 집에서 보내게 될까. 계속해서 미뤄온 약속들처럼 또 나는 미뤄질까. 입 안 가득 채워진 메말라가는 퍽퍽한 보쌈이 느껴지는 것 같다. 퍽퍽함을 좋아해도 조금은 벅찬, 그래서 금방 젓가락을 내려놓게 되는 그런 보쌈이. 다시 또 하루가 저물어가고, 여전히 나는 불만족한 상태. 내일은 불만족의 불을 조금 더 지울 수 있을까. 공연히 또 기대를 걸어보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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