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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느 한끼

대화 맛 먹태

과거의 한 끼_먹태와 맥주

by 여느진

2019년 10월 29일, 오후 10시 34분


할 일이 쌓여 불가피하게 남아서 일더미를 하나씩 해치우고 나서는 길. 9시가 지난 도로는 지나치게 적막하다. 불 꺼진 가게들은 그들이 그동안 얼마나 거리를 밝게 채워왔었는지 새삼 깨닫게 한다.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유독 크게 울리는 퇴근길.


맥주가 진하게 생각나는 순간이다. 요즘은 정신도, 육체도 모두 피로하다. 신경 써야 할 일이 점점 늘어나고 나를 위한 것들은 점점 뒤로 밀린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마트가 문을 닫았고, 조금 더 걸어가면 보이는 편의점에 들러 맥주 사기를 피로를 탓하며 미루는 것처럼.


걱정과 일은 왜 해도 해도 줄어들지 않는 걸까. 집에 오자마자 씻고 노트북 앞에 앉자마자 다시 진하게 맥주가 생각났다. 눈으로라도 청량감을 느끼고 싶어 사진첩 속 맥주들을 올려본다. 그러다 발견한 먹태와 생맥주. 같은 교양을 듣다가 우연하게 친해진 친구와 퇴근길에 만나 마셨었는데. 이 친구도 만난 지 오래되었다는 걸 떠올린다.


지금은 교정 때문에 자주 즐기지 못하지만, 작년 말에 나는 먹태에 한창 빠져있었다. 고소하고 바삭하고 퍽퍽하고. 그래서 맥주를 계속 마시고 싶게 만들고. 마요네즈와 청양고추, 간장이 섞인 소스에 찍어먹으면 끝도 없이 들어갔다. 먹태를 먹을 땐 꼭 맥주를 마셨고, 그때마다 앞에 있는 건 가족이나 친구들. 한 손에는 먹태를 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기 좋아서 더 빠졌었다. 같이 보는 사람에 따라 영화가 다르게 기억되듯, 음식도 같이 먹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법이니까. 나는 먹태의 맛도 좋아했지만, 앞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도 좋아했다.


높게 쌓아 올려진 먹태가 하나둘 허물어가다 끝내 빈껍데기만 남았을 때 대화가 끝난다. 대게 맥주가 두어 잔 비워진 상태. 허물어진 먹태만큼 쌓인 대화가 까마득했다. 지금의 내 옆엔 대화가 아닌 할 일과 피로가 쌓여있지만.


지금 나는 맥주를 마시고 싶은 걸까, 대화를 하고 싶은 걸까. 적막한 퇴근길이 다시 떠오른다. 텅 빈 거리에, 그리고 지금 적막한 내 마음에 다시 대화를 하나둘 쌓아 올리려면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까. 자꾸만 미뤄지는 나를 멈춰 세우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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