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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진 Mar 27. 2021

여유 넘치는 바지

오늘의눈 맞춤

2021년 3월 26일, 오후 3시 42분


 봄을 맞이해 구입한 바지 두 개가 출근 전에 도착했다. 조금은 찝찝한 느낌으로 일찍 일어난 상태라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택배를 들여왔다.


 품이 큰 바지들. 맨발에는 살짝 끌리는 길이에 어벙한 너비는 꼭 누군가의 옷을 훔쳐 입은 것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그리고 편했다. 그래서 괜찮았다. 커다란 바지를 입고서 출근 전 침대에 누워있는 내 모습이 꽤 재밌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눈은 뻐근하고, 머리는 지끈거렸지만. 


 오늘의 택시는 색다른 방법으로 길을 돌아갔다. 화도, 짜증도 나지 않았다. 미세먼지 섞인 바람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고, 밝은 빛으로 넉넉하게 다리를 감싼 바지의 느낌도 좋았다. 일을 할 때에도 무언가 초연한 느낌이었다. 중간중간 쉴 때마다 괜히 바짓 자락을 붙들었다. 부드러운 촉감과 손이 닿는 넓은 면은 어떤 위안을 줬다.


 퇴근하기 직전, 조금 무거운 소식을 전했다. 내내 미뤄둔 숙제 같았는데, 드디어 해결한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은 슬프기도, 조금은 홀가분하기도 했다. 여전히 바지는 여유 있게 나를 토닥였다. 공간이 넓으니 나를 토닥일 힘이 있는 건가. 그럼 오늘 내가 뱉은 소식은 나중의 나를 위한 공간이 될까. 스미는 바람을 가르고 걸으며 생각했다.


 바지의 여유가 조금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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