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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진 Apr 07. 2021

매운맛 도장

오늘의눈 맞춤

2021년 4월 6일, 오후 4시


 나는 감동의 역치가 낮다. 남들이 쉽게 지나치는 풍경을 지나치지 못하고, 남들이 가볍게 던지는 것에도 크게 반응한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 숨겨진 보물을 잘 찾아내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작은 것에도 쉽게 영향을 받는다.


 어제 노을에 물들어가는 저녁의 순간에 감동을 받은 것처럼, 오늘도 역시 길거리 담장 위 철쭉, 들어간 가게 안 작은 소품들, 벚꽃이 너무 일찍 지고 남은 초록빛 봉오리와 잎새 그 사이의 것, 아이스 아메리카노 위에 올려진 곰돌이 모양 커피 얼음에 감동을 받았다. 어쩌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내가 그런 사소한 것들을 담아내는 순간에 함께 해준 사람이 있다. 나이 차이가 제법 나지만 언제나 그 차이를 잊게 만드는 소중한 동생. 내가 나이가 더 많지만 왜인지 이 동생 앞에서는 내가 더 어리게 느껴지기도, 때론 동갑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그런 사람. 그만큼 내가 애써 어른인 척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지.


 이 친구가 나에게 알려준 두 가지 음식이 있는데, 하나는 마라탕이고 나머지 하나는 오늘 먹은 훠궈다. 어쩌다 둘 다 밝은 색 상의를 입었는데, 평소라면 흘리는 사람이 나였을 것을 오늘따라 동생이 온몸으로 훠궈를 맛봤다. 그리고 난 그 모습에 열심히 웃었다.


 하지만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 캐릭터 도장을 자랑하다가 훠궈 소스에 그대로 빠트렸다. 동생은 얼룩 묻은 옷을 닦고, 나는 마라향이 듬뿍 나는 도장을 닦아내는 점심시간. 어쩌다 오늘 가장 길게 나와 눈 맞춤을 한 존재가 되어버린 매운맛 도장. 휴지에 묻어난 처절한 노력들. 그래도 웃을 수 있는 건 같이 있는 사람이 즐거워서겠지.


 사실 이 즐거운 순간들, 사소한 순간들이 내 하루에 기록되기엔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하철을 타자마자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세상이 노래져서 주저앉았는데, 다른 승객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 앉으라며, 괜찮냐 물어봐주셨다. 물론 사양했고 잠시 후 괜찮아졌는데, 또 환승하러 가는 길에 같은 증상이 반복되어 에스컬레이터 앞에 주저앉아 고이는 침을 삼켜냈다. 그리고 이번에도 지나가던 분이 부축해주시고 도와주셔서 무사하고 안전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내 사소한 즐거움 뒤에는 이렇게 많은 따스함이 있다. 조금 더 나를 챙기고, 주변의 사람들을 챙길 수 있길. 아직도 매운 향이 남아있는 도장을 괜히 만지작 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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