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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진 May 07. 2021

녹아내린뚜껑 괴물

오늘의 눈 맞춤



2021년 5월 6일, 오후 3시 48분


 어제, 엄마가 잔뜩 해둔 카레를 드디어 다 먹었다. 다시 말해 오늘 내가 일어나서 무언가를 해 먹어야 했다는 소리. 얼마 전에 우연히 요리법을 보고 해 먹어볼까 싶어 장까지 봤던 가지 그라탱을 떠올렸다.


 가지를 버터에 굽고, 치즈와 소스를 차곡차곡 담는 것까지 순조롭게 흘러갔다. 속으로 나 이제 진짜 요리 천재가 되어가나 봐, 자만도 했다.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꺼내기 전까진.


 전자레인지 문을 열자마자 내가 본 건 녹은 뚜껑이었다. 고무 뚜껑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안 된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친구들한테 말하자 당연한 거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조금만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걸. 녹은 뚜껑이 벌린 입 모양이 꼭 비웃는 것 같았다.


 오늘은 망가짐의 날인가. 새벽에는 두 달만에 이북리더기가 고장 났다. 열심히 검색해 강제로 다시 끄고 켜는 방법을 시도해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창의력도 고장 났나, 과제를 하는데 맥주를 마시며 뚝딱이다 간신히 마감을 지켰다. 엄마 말대로 흡사 괴물과도 같은 녹아내린 뚜껑이 내린 저주인 걸까.


 망가짐을 핑계로 더 비싸고 좋은 새 이북리더기를 주문했다. 잠들기 전, 오늘은 오랜만에 종이책을 집어 들겠지. 어떻게든 과제를 완성해낸 보상으로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도 더 구입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그라탱은 맛있었으니 다음번엔 고무 뚜껑을 덮지 않고 더 맛있고 안전하게 만들겠지.


 억지로 긍정 회로를 과하게 돌리는 건 좋지 않겠지만, 지금의 내겐 필요하다. 그동안 틈 많은 하루여서 작은 사건들이 터져 채워주는 건가 하는 의문도 든다. 어쨌든 또 지나간 나의 5월의 여느 날. 괴물은 더 이상 만나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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