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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진 May 21. 2021

회색 고무장갑의 마법

오늘의 눈 맞춤

2021년 5월 20일


 세워둔 계획은 많았는데,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눈을 떴다가 감는 일을 여러 번 반복했다. 완전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저녁에 가까워져 가는 시간. 꿈의 잔여물이 머릿속에 찝찝하게 남아있었고, 묘하게 찌뿌둥했다.


 하기 싫고 미루고 싶은 무언가를 하거나 좋아지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역시 좋아하는 무언가를 곁들이기. 비 오는 날에 하는 외출이 괜찮아진 이유 중 하나가 장화인 것처럼. '해야 되는데'라는 생각은 마음에 짐만 쌓아 올릴 뿐, 무언가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설거지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설거지를 포함해 모든 집안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재능도 없어서 가족들은 나에게 요리든, 설거지든 뭐든 집안일을 기대하지도, 하길 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다 퇴사하고 나서 혼자 요리며 뭐며 손대기 시작한 거고, 꽤 재밌어서 종종 하곤 한다.


 그럼에도 설거지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재미도 없고 그냥 숙제를 해치우는 마음으로 해낸다. 고무장갑끼는 것도 귀찮아 맨 손으로 했는데, 하고 나면 손이 거칠거칠해지는 기분이 싫었다. 그래서 멋있는 고무장갑을 충동구매했다. 회색에 고리도 달려있는.


 오늘은 그 고무장갑을 처음으로 사용한 날. 동생이 정말 끝내주는 치즈 라볶이를 야식으로 만들어줬다. 늦은 새벽에 불을 조금만 켜놓고 '와, 진짜 맛있는데?'를 남발하며 싹싹 긁어먹었다. 그리고 그 후에 남은 설거지.


 새로 산 장갑을 끼고 해 보니 꽤 괜찮았다. 멋진 장비와 함께하니 기분도 좋았다. 하는 행동은 똑같은데, 괜히 더 전문적으로 하고 있는 기분? 물건 하나가 감정을 바꿀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뭐가됐든 설거지를 끝냈다. 앞으로도 하기 싫은 일이 계속 생길 거고, 계속 해내겠지. 그렇게 매번 달라지겠지. 그렇게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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