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느진 May 22. 2021

어느 방울들

오늘의 눈 맞춤

2021년 5월 21일, 오후 3시 48분


 잠을 방해하는 건 언제나 새벽이다. 생각이 가장 많아지고, 그 생각이 잠이 들어올 차리마저 차지해버린다. 거기에다가 조금 실망스러운 일이 생겨서 잠을 도저히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이도 저도 아닌 새벽을 보내다가 겨우 한두 시간 잠들었다.


 택배를 보내러 잠깐 외출하는 길, 벽에서 귀여운 흔적을 찾았다. 어렸을 적 자주 봤던 만화 캐릭터 판박이 스티커가 잔뜩 붙어있는. 가까이에서 보고 반가워하다가, 멀리 떨어졌을 때 더 넓어진 화폭이 꼭 비눗방울이 하얀 파이프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제각기 다른 거품에 갇힌 건 어린 날의 나일까.


 벽에 붙은 판박이 스티커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옅어지겠지. 어쩌면 저 위에 새로운 페인트가 덧질해질지도 모른다. 거품이란 언젠가 터지고 마는걸. 아이들이 지나다니며 장난 삼아 붙였을 흔적에도 생각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내 버릇.


 택배를 보내고, 아메리카노를 사러 들어간 카페에서 반쯤 충동적으로 신메뉴를 사서 나왔다. 바다의 빛깔을 담았다는 라테가 왜인지 아른거려서. 괜히 얼음을 달그락거리며 돌아갈 때 여전히 벽에 붙은 파이프는 색도, 모양도 다양한 거품을 뱉어내고 있었다. 아직은 그대로구나.


 지난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후회의 씁쓸함을 남기기보단, 방울이 팡 터질 때의 짜릿함만 남기고 살 수 있다면 좋겠는데. 오늘은 잠을 푹 자고 싶다. 나쁜 기분도 퐁, 터트리고. 남는 흔적들이 밝았으면.

매거진의 이전글 회색 고무장갑의 마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