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느진 May 24. 2021

밤과 엄마와 장미

오늘의 눈 맞춤

2021년 5월 23일, 오후 9시 7분


 아침에 잠들고 오후에 눈뜨기. 이젠 너무도 익숙한 하루의 순서. 날린 하루를 자책할 시간에 그냥 뭐라도 하는 게 낫다는 건 경험으로 알았다. 매일이 주말 같은데, 견디지 못하고 바쁨을 끼워 넣는 것도 습관이다. 한없이 게으르고 싶으면서 동시에 부지런하고 싶다. 모순은 내가 가진 장점이자 단점이다.


 엄마와 드디어 집 앞에 생긴 파스타집에 갔다. 마르게리타 피자도 맛있었고, 원래는 예약해야만 먹을 수 있다는 수비드 스테이크도 운 좋게 먹을 수 있었다. 까르보나라도 계속 맛있다고 감탄하며 싹싹 비워냈다. 모두가 아는 입 짧은 내가 남김없이 모든 음식을 먹었으니 맛은 보증된 거였다. 엄마도 호평을 남겨줘서 더 기분 좋았다. 집 바로 근처에 이렇게 맛있는 가게가 생겼다니, 행복해졌다.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엄마와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배가 불러서 산책 겸 엄마와 반지를 맞추러 갔다. 성년의 날에 아빠에게 금목걸이를 받았던 기억이 선명한데, 이젠 엄마에게 금반지를 선물하고 스스로를 위한 금 치렛감을 구매하는 순간이 오다니. 세공을 맡기고 나오는데 조금 어색했다. 엄마 아빠에게 선물 받는 것보다 선물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때가 왔다.


 해가 지고, 바람이 꽤 쌀쌀해졌다. 팔을 문지르며 천천히 집으로 걸어가는 길. 장미가 활짝 피어 늘어진 모습에 엄마와 나, 둘 다 발걸음을 멈췄다. 주변 풍경에 관심을 두는 습관은 어쩌면 엄마에게 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장미 밑에 한참을 서있었다. 엄마의 사진을 많이 담았다.


 내일도 걸어갈 같은 길. 오늘보다 더 밝은 배경의 장미를 보겠지만, 당분간은 장미를 보면 엄마가 생각날 것 같다. 폴라로이드로 인화한 엄마의 사진을 카드지갑에 새로 넣었다. 장미는 언젠가 지겠지만, 이 순간은 계속 남아있겠지. 그리고 다음 여름이 찾아오면 또 다른 장미와, 또 다른 이야기가 필 거고. 그때 내가 오늘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오래도록 선명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넘어진 도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