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온정 사이
추억의 따뜻함과 냉정한 현실의 문서가 공존한다. 늘 그랬듯이 양가 감정이 존재한다. 좋았다 싫었다. 아쉬웠다가 부담되었다가. 그 범위에서 왔다갔다함이 쓰러질 정도가 아닌 것에서 왔다갔다 하면 버틸 수 있다. 견뎌낼 수 있다.
두 개의 메시지가 공존하는 이 순간, 마음의 복잡한 진심을 마주했다.
사랑은 여전히 있고, 그러나 현실은 무겁다. 무거운 현실을 벗어날 수 없어서 그 사회적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왜 하필이면 중요한 일을 할 때 여러군데에서 메시지와 전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오고 그래서 핸드폰이 렉 걸리게 만들어서 중요한 인증을 못하게 만든다. 신기하긴 하지만 이것을 넘어서서 선택을 해야한다. 안 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선택을 못하게 만드는 그런 순간. 마치 온 우주가 나서서 방해를 하는 것처럼 일이 알아서 척척 안되게 만드는 그런 신기한 순간을 종종 경험한다. 그 순간을 넘어서서 해내야 한다.
그러면 다음 순서의 일들이 또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흔들리면서 중심을 잡아간다. 흔들리면 오히려 중심을 잡을 수 있다. 그 범위안에서 즐길 수 있다. 그 범위내에서는 내가 어떻게 해도 누구도 뭐라고 할 근거가 없다. 그 안에서 자유가 있다. 그 자유를 누리고 싶다.
그럴려면 그 레인지를 넓혀서 즐기면 될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세상과 소통하고 연결되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렇게 감정의 주인이 된다. 감정을 흘려 보내고 관찰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도 감정의 주인이 되어야 할 수 있다.
현실의 처리가 감정으로 해결이 안되면 실질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이 아무리 좋은 방법이고 최선이더라도 감정이 존중받지 못하면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겠다.
그런 기준은 분명히 하고 싶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울음과 요구에는 기이하게 반응했다.
그 속에는 통제와 이미지에 대한 그의 심리가 숨어 있었다.
누군가의 감정은 누군가에게 통제 불가능한 혼란이었고,
타인의 요구는 그가 ‘구원자’로 느낄 수 있는 무대였던 것이다.
그의 공감은 선택적이었다.
그러므로 감정과 행동의 분리가 필요하다.
이제 울지 않는다.
대신, 감정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반응에 본인의 감정의 가치를 묶지 않는다.
본인의 감정이 무시 당하는 것은 상대가 통제를 잃는 것을 두려워한 결과임을 알고 감정의 방향을 상대에게서 본인에게로 돌리면 된다.
이것을 연습하면
조용한 중심이 오히려 더 강한 언어가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게 현실은 복잡하지만 감정의 통로는 닫지 말고 이성의 온도와 정서의 온도가 함께 흐를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가 보자.
그렇게 노력하고 애쓰는 과정에서 성숙하고 품위있어 지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