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엘리 Mar 02. 2023

물에 빠진 나를 건져 올린 수영

즐거움의 순환 고리

짝꿍과 플랫 메이트들이 이른 아침 바쁘게 출근을 한다. 나는 밖이 조용해지면 방에서 나온다. 잠옷 차림으로 멍하니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양치만 하고 가장 입고 벗기 쉬운 원피스를 뒤집어쓰듯 입는다. 전날 건조대에 걸어 놓았던 물안경과 수영 모자, 수영복을 가방에 챙겨 넣고 선글라스를 끼고 아파트를 나선다. 목적지는 모퉁이를 돌아 조금만 걸어가면 나타나는 호텔이다. 정확히는 호텔 안의 수영장으로 가는 것이다. 호텔 입구에서 직원이라도 마주치면 직원이 호텔의 손님을 대하듯 무거운 현관문을 대신 열어준다. 다소 민망한 기분이 든다. 직원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살짝 미소를 짓고 얼른 수영장으로 향한다.


수영장에 도착했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풀장 가장자리에 선다. 높은 개폐식 반투명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에 아른아른 물그림자가 풀장 바닥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수영장 공간의 한 면에는 매우 큰 접이식 문이 있다. 덕분에 날씨가 좋은 날에는 양쪽으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고 주변의 빌딩 숲과 거리가 살짝 보인다. 풀장 주변으로 썬베드가 놓여있어 이곳이 호텔 수영장임을 잊지 않게 해 준다. 25m 레인이  네 개 있는 제법 그럴듯한 수영장인데 호텔에서 운영을 해서 그런지 호텔의 손님이 가끔 오는 것 외에, 나처럼 장기 회원권을 끊어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이 아니라면 나처럼 오전 시간에 이용하는 손님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덕분에 수영장을 전세 낸 듯 혼자 수영을 하거나 고작해야 두 세명 정도가 동시에 수영장을 이용했다.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기에 수영장에서는 물살을 가르는 소리와 숨소리만 들릴 뿐 고요하다.


팔다리 스트레칭을 하고 허리와 목을 양쪽으로 돌린다. 어깨를 고개와 반대 방향으로 펴 꾹꾹 눌러준 뒤, 발 끝부터 물에 적신뒤 물속으로 미끄러지듯 쑥 들어간다. 제자리에서 점프를 몇 번 하면서 레인 끝을 바라본다. 동시에 물안경을 꼭 눌러 얼굴에 틈새 없이 착 붙인 후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물속으로 완전히 들어간다. 팔은 쭉 펴고, 고개는 꾹 누르고, 발의 앞꿈치과 발가락으로 힘껏 풀장 벽면을 밀어낸다. 10 m 정도는 고개를 밖으로 내밀지 않고도 죽 갈 수 있다. 오히려 고개를 내밀지 않으려 머리를 더 집어넣는다. 재미있게도 머리를 물속으로 집어넣으려 할수록 몸은 떠오른다. 발이 지느러미라도 된 것처럼 동시에 위아래로 움직여 추진력을 더한다. 한참 가다가 드디어 오른팔을 물 밖으로 들어 올리며 손 끝을 멀리 던져 한 바퀴 돌리고 동시에 고개도 오른쪽으로 돌려 숨을 쉰다. 그다음부터는 왼팔 오른팔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무념무상 여유 있게 레인을 따라 할 수 있는 한 많이 왔다 갔다 한다. 오로지 팔다리를 움직이며 숨쉬기만 한다. 어느 순간 이 단순한 동작들로 수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즐겁게 느껴진다. 움직임과 호흡이 리듬에 잘 맞아 돌아가면 원래 계속 물속에 있었던 것처럼 그다지 힘들지도 그다지 숨이 차지도 않는다. 한참을 하다가 쉬고 싶을 때 자유형을 멈추고 배영을 했다가 평영을 했다가 잠수도 했다가 하면서 혼자 논다.  


한 시간 정도 자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풀장에서 나와 여성 탈의실 옆에 있는 사우나장에서 잠깐의 사우나도 즐긴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비치되어 있는 타올로 물을 닦고 호텔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호텔 어메니티로 제공되는 바디 로션까지 몸에 바르고 옷을 입고 수영장을 나온다. 집으로 돌아가도 되지만 호텔 로비의 바인지 카페인지에 들른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시켜 놓고 마치 외국으로 여행을 온 설레는 여행자처럼 앉아 창을 통해 바쁘게 지나다니는 외국 사람들을 구경한다.




누가 봐도, 모두가 출근해 바쁘게 일하는 시간에 유유자적 고급 호텔의 수영장을 다니며 노는 것으로  보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일을 하고 싶은데 백수가 되어버린 속사정이 있다. 모든 것이 귀찮은 일이고,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하찮게 여겨지는데도 꾸역꾸역 수영장에 왔다는 속사정도 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는 한 모금만 마신채 그대로 두어 긴 컵의 바깥 쪽에 물방울이 그득 맺힌다. 곧 김이 빠지고 미지근한 상태가 될 것 같다. 식어가는 맥주잔을 바라보며, 어떤 날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복기한다. 시작보다 마무리를 잘하는 사람이 되자고 늘 마음에 품고 사는데 어찌 된 일인지 뉴질랜드의 첫 직장이면서 2년 가까이 일했던 약국에서는 도저히 마무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나를 좋은 직원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원망과 함께 사장과 동료들이 참 미운 상태로 울며 불며 약국을 그만둔 현실을 떠올린다. 마무리가 아름답지 못했다. 어떤 날은 속으로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도 했다. 보기 싫은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다른 종류의 괴로움이다. 또 다른 날은, 이직을 위해 인터뷰를 봤지만 불합격한 약국이 떠오른다. 어떤 대답을 했어야 합격했나 생각한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 끝에는 항상 ‘남들은 이직도 잘하고, 외국 생활에도 척척 적응하며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민’은 늘 낯선 얼굴이었고, 나는 늘 아무것도 모르고 제대로 하는 것 없는 부적응자였다.


여행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호텔 로비에 앉아 있으면 비록 머릿속에 온갖 잡다한 생각을 하고 있어도 다른 장소, 이를 테면 근무했던 약국, 보다는 자유로웠다. 호텔에서는 나를 아무도 부적응 이민자로 대하지 않았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처음인양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봐도 그저 여행객으로 여겼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어도 겉모습은 고급 호텔 로비에서 백주대낮부터 맥주를 마시며 여행을 즐기는 동양인 여행객일 뿐이었다. 호텔이 주는 익명성에 기대어, 괜찮은 척 앉아서 비참한 시간을 견뎠다. 그렇게 몇 달간 거의 매일 수영장을 다녔다. 수영을 하고 씻고 호텔 로비에 앉았다를 반복했다. 처음 수영장을 다니기 시작할 때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힘든 생각은 차차 줄었다. 백수에다 부적응 이민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 그냥 기분은 나아졌다. 창밖의 계절이 눈에 들어왔고 맥주가 식어가도록 넋을 놓고 앉아 있지 않았다. 오후에 무엇을 할지 생각하고, 어디로 여행을 하면 좋을지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수영 덕분이다. 몸을 움직이며 수영을 하다 보면 잡념은 줄어들고 즐거움이 남는다. 몸이 단단해지면 마음도 단단해진다. 몸의 근육과 마음의 근육은 이어져있는 것이 틀림없다. 수영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손끝을 멀리 던질 때마다, 수면에서 몸에 힘을 빼고 쭉 펼 때마다 무거운 마음은 가벼워졌고 꼬깃꼬깃 했던 마음도 펴졌다. 몸과 마음에 어느덧 즐거움이 베어 든다.




바닷가가 훤히 보이는 거실에서 밖을 바라보면 해변을 걷거나 뛰는 사람들이 참 많다. 건강해지기 위해서라든가, 뛰는 것을 좋아해서라든가의 자기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혼자 상상한다. ‘저들 중 적어도 한 사람은, 과거의 어느 때 나처럼 너무 마음이 힘든데도 나와서 꾸역꾸역 뛰고 있는 것이다. 팔을 들어 올리고 다리를 들어 올리며 바닥에 있는 자존감을 끌어 올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라고 말이다. 그들을 응원하고 그들에게 미소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몸의 즐거움이 마음이 즐거움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그들의 삶에도 적용될 날이 머지 않았다고 텔레파시를 보낸다.




 본 매거진 ‘다섯 욕망, 일곱 감정, 여섯 마음’은 초고 클럽 멤버들과 함께 쓰는 공동 매거진입니다. 여섯 멤버들의 ‘희로애락애오욕’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슬픔의 아름다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