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에게는 흔한 욕망이 저는 없어요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우하고 있는 한 출판사에서 업로드한 피드를 읽었다. 그 피드가 아니었더라도 이미 짐작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다. 피드의 내용에 따르면, 현재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순위 100위까지 상당수가 경제/자기 계발 도서라고 했다. 자기 계발서로 구분된 도서가 베스트셀러 앞자리 순위를 차지한 세월이 20년은 족히 된 것 같은데 그 기간 동안 한 번도 그 분야의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유명한 몇 권은 읽긴 읽은 것 같은데 공감도 동화도 하지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함께 연재하고 있는 매거진 ‘다섯 욕망 일곱 감정 여섯 마음‘의 문우들과 지난 연말, 줌으로 송년의 밤을 보냈던 날에도 이와 흡사한 생각을 했다. 그때의 상황은 이렇다. 모임의 리더 격인 선량 작가가 새해를 맞이해 제안을 하나 했다.
“새해를 맞이하여 매달 노션에 그 달의 계획을 각자 게시하여 나누고, 세운 계획을 실천하도록 서로를 격려해요. 우리.”
좋은 취지의 말이었다. 다른 문우들도 좋아했다. 그 말에 동의하지 않고 찬물을 끼얹은 청개구리 같은 내가 문제였다.
“저는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살아요.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즐겁게 살면 그뿐이거든요.”
선량 작가는 대놓고 나에게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신 선량 작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리엘리님은 참 일반적이지 않으세요. 본인도 아시죠?”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내가 그런 사람인가’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사실 나는 내가 굉장히 상식적이고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람이라고 늘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작가님의 그 말을 며칠간 혼자 곱씹었더랬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어떤 모임에서 딱히 똘아이가 없다 싶으면, 그때는 내가 똘아이라더니 과연 그랬다. 이 모임에서는 내가 똘아이였던 것이다. 미래의 계획은 세우지 않고, 이렇다 할 목표도 없고, 자기 계발, 부의 축적 이런 쪽에는 관심이 없는 나라는 사람은 요즘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똘아이로 분류될 것 같다.
이번 주로 끝을 맺은 그림 수업에서도 내가 적극적이었다면, “그림으로 돈 벌기”에 관련된 더 많은 수업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2주에 걸쳐해야 하는 과제만 해도 그림 그리기 과제 이외에, 자기 계발 및 지속적인 성취와 관련한 내용을 적는 것이었다. 이를 테면, “최근에 질투를 느낀 일을 적고,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를 적어본다든가, 또는 “비전 보드”라는 것을 만들어 목표 이미지를 넣고 설명을 적는다든가 하는 것이다.
질문을 보자마자 순수한 내적 동기가 아닌, 타인과의 비교에 의해 생긴 ’질투‘를 자신의 발전 원동력으로 삼으라는 것인가라는 비판적 느낌부터, ‘비전’이라는 내 기준에서는 정체불명의 외래어를 굳이 사용하면서 먼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가까지, 하고 싶지 않은 과제라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찼다. 그러나 강사가 열심히 정한 ‘아티스트’로서 길을 걷는 데에 필수적인 커리큘럼이라는 것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따랐다. 이 과제의 지향점이 “그림을 그리며 즐겁기”에 있지 않고, “그림이라는 자기 계발을 통해, 그림으로 수익 창출하기”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원하는 것이라고 보면, 요즘 우리나라 사회의 욕구 방향이 ‘자기 계발과 부’에 있구나 싶어 나 혼자 괜히 씁쓸하다.
부의 축적 신드롬과 자기 계발 열풍에 빠져 있는 우리나라를 향해, 젊은 나이에 10억, 100억을 모았다는 유튜버는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를 콘텐츠로 삼는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면서 아직도 부를 더 축적하고 싶은 욕망에 유튜브를 하고 있는 것인가? 100억 자산가는 삶의 여유를 통장에 찍힌 돈으로만 누리고 정신적인 결핍에 시달리는 건지 온라인의 “구독”과 “좋아요”에 왜 그렇게 목을 매는가?
자기 계발서에 흔히 나오는, “미라클 모닝”, “비전의 시각화/언어화”, “나 자신의 브랜드화” 이런 류의 말들은 사람의 욕망을 부추긴다. 이런 책들에서는 이렇게 하면 더 나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 확신하고 있다. 그것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은 미래를 향한 욕망에 사로잡혀 정작 하루하루를 남과 경쟁하고, 나 자신하고도 경쟁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나라처럼 “남들이 하는 것은 나도 다 해야지.” “옆집 애는, 옆집 남편은, 옆집 부인은……”을 쉽게 말하는 비교의 사회에서는 남은 곧 경쟁 상대다. 심지어, 다독이며 잘 데리고 살아야 하는 나하고도, ”어제의 나보다 나아져라, 오늘의 나와 싸워 이겨라. “라고 경쟁을 부추긴다.
우리나라의 경쟁 사회에서 벗어나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나에게 사람들은 묻는다.
“왜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셨나요? 우리나라 탈출하니 남 신경 안 쓰고, 경쟁도 없고 좋죠?”
의도를 가지고 정해진 답을 묻는 그런 질문에 나의 진실을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 진실을 말해도 그들은 뒤에서 콧방귀를 뀔 것을 안다.
“하루하루 더 열렬히 사랑하며 살려고요.”
그들이 뒤돌아서서 웃어도 괜찮다. 우리나라에 살 때도 남이 한다고 나도 하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다. 남의 일에 배 놔라 감 놔라 하지도 않았다. 미래의 어느 날, 남들이 말하는 “성공과 성취”를 하려는 욕망 따위는 전혀 없고, 그에 따른 계획도 있을 리 없고, 자기 계발에 관심 없이, 하루하루 열심히 사랑하며 즐겁게 살았으니 내일 사라져도 괜찮은 똘아이니까 말이다. 미래의 먼 점 또는 남들처럼/남들만큼 사는 점을 찍어 놓고 그 점만 향해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삶은 조금도 살고 싶지 않다. 되고자 하는 것도, 욕심내 갖고 싶은 것이 없어도, 하루하루 충실히 점찍으며 살다 보면, 그 점들이 연결되어 선이 되는 삶을 지향한다. 점만 찍다 끝나도 괜찮지 않을 것은 또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