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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엘리 Dec 28. 2023

보라보라에 비가 오면

플랜 비 가동

모레아 섬을 뒤로하고 보라보라 섬으로 간다. 비행기의 왼쪽 좌석에 앉아야 하늘에서 라군과 섬을 볼 수 있다는 정보를 다들 들었는지 비행기 탑승 준비를 시작하자마자 사람들이 순식간에 줄을 선다. 작은 비행기라서 지정 좌석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도 눈치껏 줄의 앞에 서서 비행기의 왼쪽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하늘에서 보이는 라군에 둘러싸인 모레아 섬과 보라보라 섬의 모습이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렇게 50분 정도를 날아 보라보라 섬에 도착이다.

공항에는 각 리조트에서 직원이 나와 기다리고 있다. 각 리조트의 손님을 찾아 환영의 티아레 꽃목걸이를 걸어준다. 보라보라 섬은 오테마누 산이 우뚝 솟은 보라보라 본섬이 있고 본섬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모투에 이름난 리조트들이 위치하고 있다. 본섬과 모투 사이를 푸른 라군이 둘러싸고 있는 독특한 섬의 모양에 따라, 북쪽에 위치한 모투의 공항에서 리조트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배를 타고 이동하게 되어 있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은 각 리조트 직원의 인솔에 따라 리조트의 보트를 타고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가 고른 리조트는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르 보라보라 바이 펄 (Le Bora Bora by Pearl) 리조트다. 보라보라 섬의 이름난 리조트 중에 유일하게 폴리네시아인들이 소유하고 리조트라고 한다. 그것 때문에 ‘르 보라보라 바이 펄’을 선택한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그보다는 비용적인 측면이 큰 이유였다(포시즌과 세인트 레지스 제외됨). 그 외에 우리가 르 보라보라 바이 펄 리조트를 고른 기준은 오테마누 산 전망일 것(남쪽에 있는 리조트들이 제외됨), 바다의 깊이가 너무 깊지 않을 것(동쪽에 있는 리조트들이 제외됨), 이왕이면 리노베이션이 최근에 이루어진 곳 (르 보라보라 바이 펄 당첨) 정도가 있다.   


리조트의 보트를 타고 르 보라보라 바이 펄 리조트에 도착했다. 로비부터 상당히 웅장하다. 리조트에서는 이미 대부분 손님들의 도착 시간을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대부분의 일정이 비행기 시간과 연계되어 있고, 투어 에이전트에 따라서 비슷한 일정을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 바로 방을 안내받았다. 방으로 가는 동안에는 직원으로부터 리조트 시설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듣긴 들었는데, 매우 흥분되고 설레는 기분에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긴 했지만 말이다.


도착한 오버워터 방갈로 204호실의 문을 열었다. 남편에게 둘이서 영원히 사랑하라고 204호를 줬나 보다 했더니 남편이 빵 터진다. 침대 위에는 꽃 장식이 놓여있고 (진짜 신혼여행은 아니지만 신혼여행으로 예약한 것은 안 비밀) 선물이라며 르 보라보라 가방과 환영 카드가 있다. 테이블 위에는 신혼여행 선물로 주는 샴페인과 쿠키가 놓여있다. 침대 끝에 위치한 라군이 내려다보이는 투명한 유리 바닥이 오버워터 방갈로의 특징이다. 라군 건너편의 오테마누 산의 정상은 구름에 가려 정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더 운치 있고 멋있다. 원래 ‘산 할아버지는 구름 모자’를 즐겨 쓰는 거니까. 몇 년 전에 진짜 신혼여행으로 이곳을 다녀간 친구 말이, ‘펄 리조트에서는 신혼여행 선물로 흑진주를 줬어.’라고 했다. 그 말을 기억하고, 안내를 끝낸 직원이 자리를 뜨자마자 혹시나 침대 위 가방에 흑진주가 들어있을까 봐 떨리는 마음으로 가방을 들여다봤다. 하하하하하. 빈 가방이었다. 몇 년 사이 흑진주가 귀해졌나 보다.


일기 예보에서 이미 다음날 정오부터는 비가 예정되어 있다. 일기 예보가 정확하다면 스노클링 익스커전을 가지 못할 듯해서 점심을 먹고 바로 라군에서 스노클링을 했다. 부디 날씨가 바뀌어 비가 조금만 오기를, 비구름이 물러나기를, 지금이 스노클링을 하는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우리가 도착한 날은 메인 레스토랑에서 전통 공연을 하는 날이었다. 노래와 춤, 의상, 규모까지 모레아의 공연과는 차원이 달랐다. 모레아에서의 공연이 훌륭한 아마추어 동호회 정도라면 르 보라보라의 공연은 정말 프로였다. 우리는 무대의 한가운데의 테이블에 자리를 마련해 주어서, 제대로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우리 말고 가운데 테이블에 자리를 한 또 다른 손님은 일행 없이 혼자 온 휠체어를 탄 중년 남성이었다. 무척 신나서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 저분이 평생 모은 재산을 보라보라 여행에 몰빵하고 혼자 죽으려다가 이곳이 너무 좋아 다시 또 오려고 삶을 계속 이어간다는 어처구니없는 영화 속 이야기 같은 생각을 했다. 남편에게 말하니, 지금이 아주 행복한 상태라면 죽는들 또 어떠냐고 그런다. 저분의 삶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인다.


“저 손님은 사실 지금이 일생의 단 한 번 보라보라 여행이 아니라, 보라보라의 리조트 비교를 하면서 여행하는 큰 손 일 수도 있어. 실은 엄청 행복한 일생을 살고 있을 거야. ”


그래, 타인의 겉모습만 보고 아무것도 지레 짐작하지는 말자. 아무도 정말은 모르는 거 아니겠는가.


식사를 마치고 나와 리조트의 밤을 걸었다. 비가 조금씩 떨어진다. 모레아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만의 오붓한 식사를 할 수 있게 자리가 마련된 것이 보인다. 르 보라보라에서는 라이브 가수가 동반되나 보다. 포크송 같기도 한 보라보라의 잔잔한 노래가 바람 따라 들려온다.


다음 날이 되었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비구름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력해져서 아침에 두어 시간 세차게 비가 쏟아졌다. 그 뒤로 비가 잦아들어 가든 산책을 했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다. 점심을 먹고는 비가 멈춘 막간을 이용해 해변에서 패들 보드도 탔다. 보트나 요트는 못 사도, 패들 보드 타고 바다에 나가 물고기 한 마리씩 낚아오면 어떤가 싶어 남편이 호시탐탐 패들 보드나 카약을 사고 싶어 했는데 좋은 경험이었다. 한 번 타 보더니, 진짜 재미없고 힘만 든다고 했다. 앞으로 패들 보드나 카약 살 일은 없겠다.  


비로 쓸려온 해변의 부유물들과 바람으로 흐트러진 가든의 이쪽저쪽을 치우는 직원들의 손길이 바쁘다. 햇볕이 날 때는 물이 비교적 얕은 르 보라보라의 바다가 제일 예쁘다고 했건만, 비가 온 뒤에는 얕고 낮은 곳으로 쓸려온 바다의 온갖 부유물들은 직원들이 치우고 치워도 그 끝이 안 보였다.


사실 우리가 이곳을 방문한 12월은 우기에 해당한다. 우기라고는 하지만, 건기보다 비가 조금 자주 올뿐, 우리나라처럼 며칠씩 장마가 지속되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믿었고 그 말이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갈 때 비가 안 올 거라는 보장은 없는 거 아니겠는가! 다행히, 우리는 비 온다고 우울해하고 그런 것은 없다. (그래도 다음에 올 때는 건기에 오는 것으로 결정했다.) 비 오니까 덜 덥고, 비 오는 보라보라를 알 수 있어서 좋지 않으냐 했다.


비가 와도 방갈로 바닥의 유리창을 보면 상어도 있고 가오리도 다닌다. 비가 와서 리조트에서는 예정에 없던 전통 공연을 비슷하지만 다르게 한차례 더 했다. 리조트에서도 늘 플랜 비를 마련해 놓나 보다. 덕분에 공연팀과 사진도 찍어 남겼다. 사진을 찍을 때 남자 댄서가 스마일 외치듯 ‘보라보라’라고  큰 소리로 외치면, 여자 댄서들이 새가 우는 듯 ’휘익‘하고 고음의 추임새를 넣는다. 신나는 포토 타임이다.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남자 댄서의 ‘보라보라’ 외침에 맞춰 남편이 바로 뒤이어 코러스로 ‘보라’라고 외쳐주니, 식당의 손님들에게서 환호성과 웃음이 터졌다. 사진을 보면 지금도 그 순간이 떠오른다.


비가 와서 리조트 다니면서 사진도 찍었다. 사진 찍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남편이지만, 이날만큼은 열심히 찍어주셨다. 삼각대 놓고 둘이서 비 오는 오테마누 산이 멋있게 보이는 우아이나 바에서 찍은 사진이 아주 마음에 든다.

이렇게 비는 물러가겠지. 비구름! 훠이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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