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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엘리 Dec 29. 2023

흑진주의 윙크

보라보라의 흑진주를 고르는 방법

눈을 뜨자마자 커튼을 비집어 열고, 오테마누 산과 찰랑이는 바다가 있는 창밖을 바라봤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흐린 하늘에 간간이 빗발이 날리고 있었다. 보라보라 섬에 도착해서 두 밤을 잤는데, 좀처럼 해가 나지 않는다. 샤워를 하면서, ‘어제 비가 제법 왔으니 오늘은 그래도 잦아들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들떴다. 게다가 오늘은 리조트를 벗어나 보라보라 타운 구경을 하기로 한 날이었고, 보라보라 동네 카페에 앉아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사고 싶었던 흑진주 귀걸이를 만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씻는 사이, 방갈로에서 바로 바다로 뛰어들어 아침 수영을 다녀온 남편도 세상 상쾌하다며 기분이 좋다고 한다.


보라보라의 흑진주 귀걸이와 잘 어울릴 법한 큼직한 초록 무늬가 눈에 띄는 새틴 롱스커트와 드레이프가 우아한 니트 티를 골라 입고, 방에서 나와 워터 방갈로를 연결하는 바다 위의 길을 걸어 아침을 먹으러 갔다. 요즘 제철이라는 달콤한 망고를 양껏 가져왔다. 멜론도 맛있어서 몇 개 끼워 넣고, 작은 브리오쉬와 크루아상, 토마토를 넣은 오믈렛도 담았다. 남편의 아침은, 밥이랑 폴리네시아 식이라는 코코넛 밀크에 버무려진 야채와 생선회, 반찬으로 먹을만한 것들이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보라보라 섬의 바이타페(Vaitape) 타운으로 향하는 페리를 탔다. 페리에서 내려 다시 15분 정도 택시를 타고 타운으로 갔다. 택시에서 바라보는 보라보라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리조트 속의 세상과는 사뭇 다르다.


택시 기사와 리조트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픽업 시간을 약속한 후, 타운의 쇼핑센터 앞에서 내렸다. 쇼핑센터에는 작은 카페 하나와, 흑진주를 판매하는 보석 가게, 각종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었고 주변에는 그 일대에서는 가장 큰 건물인듯한 노란색 외벽의 소박한 예배당도 보인다. 기념품 가게를 잠시 둘러봤다. 스노클링을 할 때 봤던, 가오리와 거북이를 나무로 깎아 만든 조각의 수준이 정교하고 썩 멋있다. 물론 사지는 않는다. 가게를 나와 우산을 쓰고 길 건너편으로 갔다. 각종 과일을 바구니에 담아 파는 과일 가판대가 있었지만, 비는 오고  손님은 없다. 건너편에는 흑진주를 판매하는 보석 가게 몇 개가 줄지어 있었다. 지나가면서 쇼윈도를 통해서 진열된 진주 목걸이, 팔찌, 반지들을 들여다봤지만 모두가 고만고만해서 어디를 들어가 보기도 애매했다. 그러다가 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가게들보다 한 단 아래, 한단 뒤로 물러나 있고 긴 실내가 보였다. 그 끝에 놓인 소파와 데스크가 정갈했으며 진열장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망설이다가 가게에 들어갔다. 마음에 들어오는 진주가 있을까 싶어 매장에 진열된 진주를 죽 둘러봤다. 호주인 아버지와 폴리네시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가게 주인 토비는 프렌치 폴리네시아에서 만난 사람 중 영어가 가장 유창했다. 우리에게 팔아야 마수걸이를 할 수 있는 것인지 뉴질랜드에서 왔다는 우리에게 매우 친절했다. 진열장을 둘러보며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었고, 착용을 해봐야 잘 어울리는지 알 수 있다며 착용을 권했다.


사실 나는 삼만 원짜리 담수 진주 귀걸이에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라서 어마어마한 흑진주 귀걸이를 사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못난이 진주라도 내 눈에만 예쁘면 그만이다. 거기에 보라보라 여행 기념이라는 의미만 담으면 몇 만 원짜리도 몇 백만 원 못지않은 물건이라는 생각이다.


조명 아래 반짝이는 흑진주들은 모양도 조금씩 다르고, 색깔도 오묘하게 달랐다. 초록빛이나 노란빛, 분홍이나 보랏빛, 회색빛을 띄기도 했다. 토비 말로는 ‘공작새’ 색깔을 보이는 것이 등급이 높다고 했다. 애초에 특별한 장식이나 세공 없는 기본형 스터드 진주 귀걸이를 고를 예정이었다. 색깔만 조금씩 다르고 0.7 mm 정도의 크기의 진주 귀걸이가 짝지어 주르륵 있는 것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아주 찰나의 순간, 바로 위에 1 cm 크기의 푸른빛이 감도는 진주 귀걸이 한 쌍을 집어 들었다.


남편이 구글 검색을 해서, 흑진주 고르는 요령을 읽어줄 때 “잘 살펴보면 자신에게 윙크하는 흑진주를 만나게 된다."라는 뜬구름 잡은 이야기를 전날 밤 들려줬는데 정말 그랬다. 정말 아주 짧은 순간, 평소 내가 즐겨하는 귀걸이의 크기보다는 조금 큰 크기의 귀걸이인데도 불구하고 저절로 손이 갔다.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흑진주가 보내는 윙크에 나도 모르게 빠져든 걸까?


거울 앞에 앉아 착용을 해보고, 귀걸이는 예쁜 상자에 담기고, 홀린 듯이 결제를 했다. 그러고는 가게 주인과 몇몇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커피를 마시고 점심 먹을 장소도 추천받고, 여권의 내 이름을 보더니 일본 이름 같다며 자신의 아내도 일본인이라는 이야기부터, 아내를 홍콩에서 만났다는 이야기, 뉴질랜드를 여행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모든 거래가 끝나고 기분 좋게 나가려는데 밖의 비가 거세졌다. 잠시만 가게에 머물다 나가려는 그때였다. 출입문 문틈 사이로 물이 들어오더니 순식간에 가게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토비는 ‘울랄라’를 연발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남편과 나는 일단 바닥에 있던 전선과 전기 제품의 전원을 뽑아 책상이나 의자 위로 올렸다. 그리고 전원을 차단하라고 토비에게 말했다. 그리고 남편은 토비에게 삽이 있냐고 묻더니 삽을 받아 들고 웃통을 벗고 밖으로 나갔다. 어린 시절 폭우에 잠긴 논에 물길 내던 솜씨로, 배수구 주변의 흙과 돌을 퍼내 제방을 쌓고 배수구가 막히지 않도록 쓸려내려 온 나뭇잎이나 부유물들을 퍼냈다. 토비는 프랑스에 있다는 건물 주인에게 화상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리고 대처 방법을 물었다. 건물주는 문을 잠그고 가는 고무호스로 물이 새어 들어오지 않게 틈새를 막으라고 했나 보다. 떡 찔 때, 떡시루에 김새지 말라고 반죽으로 막는 것과 같은 원리다.


토비는 고무호스를 찾아 출입문의 틈새를 막았지만, 이미 차오른 물은 발목을 넘어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그래도 고무호스 덕분에 문밖의 물의 수위보다 실내의 물의 수위가 일단은 낮아졌다. 나는 토비와 함께 가게 안에서 바닥에 있었던 물건들이 젖지 않도록 높은 곳으로 올리고, 남편은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가게 밖에서 여전히 물길을 냈다. 옆의 가게 주인도 어디선가 젊은이 두 사람을 불러 남편을 도왔다.


그렇게 한 시간쯤이 지나고 드디어 가게 밖의 물의 수위가 낮아졌다. 막혀있던 어딘가의 배수로가 뚫렸는지 토비의 가게 주변에 있던, 배수구로 물이 소용돌이치듯 빨려 들어갔다. 문틈을 막고 있던 고무호스를 빼고 문을 열자 가게 안에 있던 물도 서서히 빠졌다. 주변 가게보다 유난히 한 턱 낮은 건물 탓에 미쳐 빠지지 않은 물을 빼기 위해 나는 빗자루로 가게 안의 물을 쓸어내고 남편은 쓰레받기로 퍼냈다. 토비도 밀대로 물을 밀어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물을 다 퍼냈을 때는 리조트로 돌아가기 위해 픽업을 약속한 택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가 간다고 하니 토비는 매우 고맙고 미안하다며, 택시를 불러 리조트 선착장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남편은 마지막까지 토비에게, 건물 주인에게 보여주고, 보험 처리도 해야 하니 피해 상황을 사진으로 잘 찍어 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그냥 그 순간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었고, 이 자리에 있었으니 도운 것뿐이다. 지금부터 너는 뒷정리할게 더 많을 테니 나오지 말라.”


그렇게 토비에게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오는데, 토비는 허겁지겁 작은 파우치를 하나를 챙겨 내 가방으로 쑥 밀어 넣었다.   


남편은 비에 홀딱 젖었고, 슬리퍼는 물속에서 바삐 움직일 때 고리가 빠져 신을 수 없게 되었다. 쇼핑센터 근처의 마트에 갔더니 다행히 슬리퍼를 판다. 남편은 망가진 슬리퍼를 버리고, 바다색으로 ‘Tahiti’라고 수놓아진 새 슬리퍼를 샀다. 그렇게 보라보라 흑진주 보석상에서 내 생에 처음 홍수를 겪었다.


리조트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남편은 점심에 마신 히나노 맥주 한 잔의 알코올 기운과  긴장이 풀리고 피곤함이 몰려왔는지 샤워를 하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잠든 남편의 옆에 앉아 토비가 찔러 넣어준 파우치를 열어보았다. 알이 굵은 흑진주 하나가 가죽에 엮어진 남성용 팔찌와, 내가 산 귀걸이와 크기가 비슷한 흑진주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가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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