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해는 떠오르고
이틀간의 장대비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보라보라로 여행 온 그 누구라도 짧은 며칠 간의 여행에서 자신에게 닥칠 일이 ‘폭우’가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보다도 예상치 못한 일은, 비구름이 지나간 후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갠 찬란한 바다와 하늘이 내어준 기쁨과 안도의 감정이 아니었을까?
보라보라의 마지막 날이다. 남편은 이른 새벽에 이미 잠에서 깨어있다가 밤새 뒤척이며 선잠을 자고 있는 나를 깨웠다.
“바다에서 해가 떠올라.”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오테마누 산이 잘 보이는 수상 방갈로의 창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잔잔한 라군이 햇살을 받아 빛나기 시작했고,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오테마누 산 옆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와! 이 상쾌한 기분. 지난밤 쉬이 잠들 수 없어 피곤했는데, 그 모든 것이 산들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큰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이 하루를 애지중지 아껴 보내야겠다 생각했다.
남편과 함께 일출을 보고, 바로 바다로 뛰어들어 수영을 했다. 물은 맑지 않았지만 수영을 하는데 지장은 없었다. 문득문득 등으로 따뜻한 햇살이 느껴지고 얕은 바다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오는 강한 햇빛이 보여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수상 방갈로가 있는 끝까지 멀리 갔다가 돌아와, 우리가 머물던 204호 방갈로 주변까지 한 바퀴 돌고 아침 수영을 마쳤다. 서둘러 씻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 레스토랑은 야외 자리까지 문을 활짝 열었고, 직원들은 밝은 표정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내 기분 탓인지 손님들도 활기차 보였다. 하루를 온전히 보내고 오후 다섯 시 페리로 보라보라 공항으로 떠나기로 되어있는데, 잠을 설치고 새벽부터 수영을 하고 아침을 서둘러 먹은 데에는 사실 이유가 있다.
원래는 보라보라 섬에 도착하고 이튿날 오전에 스냅사진 촬영을 하기로 예약을 해두었더랬다. 일기 예보에서는 예약한 날 정오가 지나면서 비가 오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라고 혼자서 하늘과 약속을 했었다. 야속하게도 혼자 한 약속과 간절한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비는 도착한 날 밤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고 사진을 찍기로 한 시간에는 이미 비가 쏟아졌다. 그래서 다시 예약을 잡은 것이 바로 보라보라의 마지막 날 오전이었던 것이다.
방은 체크아웃을 해야 하니 짐을 얼추 정리하고, 촬영을 위해 샀던 등이 훅 파인 원피스를 (두 번째로 - 원래 예약했던 날 혹시나 해서 준비를 했었는데, 비가 왔고 그렇게 영영 못 찍게 될까 봐 둘이서 셀프 사진 찍었던 것은, 이틀 전의 다소 서글펐던 사실) 꺼내 입고 화장을 했다. 지난 1년 동안 골프장 다니면서 얻은 주근깨를 아무리 가리려 해도 가려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보라보라의 바다와 하늘이 나를 가려주고 사진을 아름답게 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약속 시간이 되고 사진작가 캐롤라인이 도착했다. 인사를 하고, 뉴질랜드에서부터 가지고 간 휘태커 초콜릿을 캐롤라인에게 선물로 건넸다. 사진을 찍어주는 고마운 마음과 함께, 이래야 주근깨를 더 잘 가려주지 않을까 하는 아첨의 마음도 살짝 넣었다. 이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방갈로 내부에서도 몇 장을 찍고, 폴리네시안 전통 카누를 타고 해변으로 가는 모습도 담았다. 꽃 장식이 달린 전통 카누를 타고 방갈로 사이를 지나갔다. 방갈로에서 나와 아침 햇살을 즐기고 있던 사람들이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기도 했다. 해변에 도착해서, 남편이 나를 맞이하는 모습도 사진에 담기고, 티아레 꽃목걸이와 화관을 쓰고 손을 마주 잡고 해변을 걷는 모습도 카메라에 담겼다. 애니메이션 ‘모아나’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남편과 나는 그렇게 캐롤라인이 주문하는 대로 보라보라의 해변에서 즐겁게 사진의 모델이 되었다. 정말 뜻깊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진 촬영이 끝나는 시간은 리조트에서 정해 놓은 퇴실 시간을 넘기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짐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전날 리조트 측에 레이트 체크아웃을 부탁했으나, 다음 체크인 손님이 있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운이 좋게도 리조트에서 데이 유즈 룸을 리조트를 떠나는 5시까지 무료로(원래 가격은 US $100) 사용하도록 배려해 줬다. 데이 유즈 룸은 로비 뒤편에 잘 숨어 있다. 샤워와 세면을 할 수 있고, 간이침대와 테이블이 있었다. 덕분에 보라보라의 마지막 순간을 더 아름답게 기억에 남기게 되었다.
사진 촬영을 마치자, 보라보라에서 꼭 해야 할 임무를 마침내 완수한 홀가분한 기분이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수영장 옆에 위치한 미키미키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참치 회가 이 집에서 제일 맛있는 것 같다. 참기름 향이 솔솔 나는 것이 사이드로 주는 밥과 함께 먹는 그 맛이 별미였다. 함께 곁들이는 히나노 앰버 맥주가 아주 딱이다. 점심을 먹고, 리조트를 어슬렁거렸다. 맑은 날의 보라보라를 잘 기억해두고 싶어서 주위를 잘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알록달록 카누가 잘 보이는 해변의 선베드에도 누워있고, 상점들도 다 들어가 보고, 정원 길과 수상 방갈로 길도 걸었다. 리조트 내를 누비며 서비스하는 모양과 색깔이 조금씩 다른 자전거도 기억에 담고, 해변에 놓여있는 로맨틱 디너 차림도 기억에 담았다.
눈부신 하루를 보냈다. 리조트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리조트의 보트를 타고 보라보라 공항으로 향했다. 구름이 모두 걷힌 오테마누 산이 보이고, 분홍색 노을이 공항을 덮을 때 다시 하늘을 날아 타히티 공항으로 향했다. 다음에 올 때는 건기에 오자고 남편과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보라보라 섬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