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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 살로메 Jul 20. 2021

여행의 이유

이유 없음의 이유 '무지개'

룸메이트 S에게


혹시 너도 오늘 무지개를 보았니? 있잖아. 난 집으로 귀가하는 길에 무지개를 보았어. 아주 커다란 무지개가 성당 위로 어찌나 우아하게 펼쳐져 있던지. 나는 집까지 단숨에 달려가서 카메라를 꺼내와 사진 몇 장을 찍었지 뭐야. 비가 내리고 있어서 한 손으로 우산을 잡아야 했기에 꽤 번거로웠지만 말이야. 사실 이 모든 행운은 골목에서 사진을 찍던 한 커플 때문에 찾아온 거야. 날은 오중충하고 비는 내리는데 퇴근 시간, 카메라를 들고 허공 사진을 찍는 추리닝 바지의 커플을 보았거든. 난 속으로 생각했어.


'이 흐린 날 도대체 무얼 저렇게 열심히 찍는 거지.'라고 말이야.


성당 십자가와 무지개


그런데 왠지 뒤돌아보고 싶더라. 나도 그들처럼. 그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더라니. 뒤돌아보는 순간 이렇게 멋진 무지개가 하늘에 떠있는 거 아니겠어? 나는 비가 내리는 것도 잊은 채 성당 십자가 위로 펼쳐진 쌍무지개를 한참 바라보았어. 그리고 이상하게 생각했던 그 커플처럼 집으로 달려가서 카메라를 꺼내왔어. 무지개는 어떤 이유로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걸까. 물론 무지개가 뜨는 과학적인 이유는 있겠지만, 우리가 무지개를 보며 늘 행복해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 세상에는 이유를 알 수 있지만 그래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으니까.


아파트 단지의 무지개와 나무


'무지개'


난 무지개를 떠올리면 초등학교 여름방학에 놀러 갔던 나주 외할머니 댁 근처의 '영산포'가 생각나. 더운 여름 반바지를 입고 그 냇가에서 한참 놀다가 세상에서 가장 큰 무지개를 보았거든. 무지개와의 첫 만남이랄까. 그래서 무지개에 대한 첫 기억은 늘 그곳이야.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나는 무지개는 2009년 여름 프랑크푸르트 골목길에서 우연히 만났던 무지개야. 여행사에서 짝 지어준 S 너와 함께 룸메이트로 지냈던 그때 말이야. 우리 마지막 여행지인 독일에서 꽤 지쳐 아무 곳도 갈 수 없었잖아. 그런 곳에서 선물처럼 만났던 무지개. 너도 기억할까?


아파트 단지와 단지를 연결하는 무지개


당시 애인과 헤어지고 무작정 떠난 유럽 배낭여행의 마지막 여행지에서 나를 위로하듯이 나타나 준 무지개가 오늘 많이 생각났어. 야간열차 안에서 일기를 쓰고 또 쓰던 조금은 슬프고 그러나 외롭지 않았던 여행에서 우리 비록 지금 연락은 끊겼지만 2주 동안 같은 방을 쓰며 꽤 친해졌잖아. 그때는 왜 그리 혼자 여행하는 게 겁이 나고 무서웠는지. 그때 난 네게 여행 온 이유에 대하여 물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질문도 대답도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이유든지 그 이유는 그날 프랑크푸르트 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무지개처럼 선명하고 아련하게 자취를 감춘 것 같아.


성당 뒤로 펼쳐진 쌍무지개


우리 그때 어느 장소를 함께 했는지, 우리 그 후에 어떻게 연락을 이어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다가 서서히 연락이 끊겼는지 하는 이유들은 생각나지 않아. 나이를 먹어도 그렇게 이유를 모르는 일들이 계속해서 생겨나지만 그 이유 없음으로 인하여 행복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


무지개를 만나는 일,

이런 이유 없고 신비로운 일들이 어느 날 문득 이 골목에 다시 찾아들기를.

어쩐지 오늘 나는 다시 한번 첫사랑과 이별한 소녀의 마음으로 사라진 그 무지개를 떠올려 봐.  


읽은 책 제목으로 글을 씁니다.

 

프랑크푸르트 골목에서 만난 무지개


<넘기지 못한 페이지>

* 제목: 여행의 이유 ㅣ 김영하 


p.81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각을 따라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끌어내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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