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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 살로메 Jul 27. 2021

게으른 게 아니라 충전 중입니다.

다가오는 것들 - 여름휴가를 떠난다는 것

2015년 여름휴가 때 머문 '료칸'


생각해보면 결혼 후 남편과 나는 성수기에 여름휴가를 떠나본 적이 없다. 매년 사람들이 북적이지 않는 6월 말 또는 7월 초에 휴가를 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특별했다. 남편이 너무 바빠서 휴가를 미리 계획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극성수기인 8월에 두 번 쪼개어 휴가 계획을 세워야 했다.


코로나19를 겪기 전 우리의 휴가 풍경은 이러했다.


1. 일단 성수기가 아닌 날짜를 정한다.

2. 가고 싶은 나라의 순위를 정한  항공권을 예매한다.

3. 여행지 관련 책을 사서 공부하고 정보를 수집한다.


그런 우리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어차피 해외에 가지 못하는 거 ‘뭐 거기 안 되면 저기 가면 되고, 저기 안 되면 여기 가면 되잖아.’라는 나태한 마음이 생겼다고나 할까.


올해에는 그 나태한 마음이 작년보다 더 심해져서 마치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학생의 마음으로 휴가에 대한 계획을 미루고 게으름을 피웠다. 이 일 저 일 바쁘기도 했지만 ‘국내에 설마 우리 둘 갈 곳 한 군데 없겠어?’라는 마음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그렇게 늦장을 피우다가 며칠 전 뒤늦게 휴가 계획의 시급함을 느끼고 급하게 국내 숙소들을 검색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맙소사. 우리가 가고자 하는 날짜의 숙박들은 거의 ‘예약 확정’이었다. 하물며 극성수기 가격을 적용해서인지 40-50만 원은 평균이고 조금 괜찮아 보이는 풀빌라 또는 독채 형식의 숙소들은 기본이 60만 원부터 시작했다. 어차피 예약조차 불가능하긴 했지만. 도대체 어딜 봐서 이 숙소가 60만 원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남편 말처럼 펜션은 펜션일 뿐이었고, 가격에 비하여 시설은 낙후되어 보였다. 게다가 서비스까지 별로라는 후기들도 꽤 눈에 띄었다.   


그러나 결코 휴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할 일을 다 끝낸 한밤중에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검색어란 검색어를 모두 검색어 창에 넣으며 숙소를 찾았다. 역시나 마음에 드는 숙소를 찾으면 예약 확정이었고, 날짜가 남아있는 숙소를 보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며칠을 그렇게 새벽 4시까지 숙소를 찾으며 보냈다. 유명하다는 숙박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며 숙박 시설을 찾고 있는데 세상에 바로 그 유명한 숙박시설이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 1년 전에 우연히 SNS에서 보고 저장해뒀던 곳이라서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다. 매년 6개월 예약이 꽉 차 있을 만큼 가기 힘든 곳이라고 들었고 그리하여 나는 그곳에서 숙박할 생각을 단 한 번도 아니,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숙소에 우리가 원하는 날짜만 비어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9월과 10월의 예약 달력을 클릭해보았는데 예상대로 모든 예약이 완료된 상황이었다. 아마도 추측하건대 누군가 사정이 생겨서 우리가 휴가를 계획한 그 날짜에(만) 예약을 취소한 것 같았다.


고요한 '료칸'의 풍경


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리고 짧은 시간에 혹여나 누군가 숙소를 예약할까 봐 재빠르게 예약을 진행했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숙소를 예약하게 된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발버둥 칠 때는 그렇게 되지 않던 예약이. 이렇게 뜻밖의 시간에 힘들이지 않고 된 것이다. 누군가는 6개월을 1년을 기다려도 예약하지 못했다는 그곳을 말이다.


이렇듯 올여름의 첫 휴가 계획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난 이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장마철에 내리는 비처럼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라고, 그건 아주 힘들이지 않은 가벼운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 순간순간 ‘다가오는 것들’을 만나며 살아가니까. ‘다가오는 것들’이 이처럼 늘 예약하기 힘든 숙소나 행운 같은 것이라면 좋겠지만 또 그럴 수만 없다는 것도 안다. 때로 우리는 몹쓸 다가옴으로 인하여 실망하고 무너지고 아파하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고요하게 ‘다가온 것들’은 언제가 또 고요하게 우리의 곁을 떠나갈 것이다. 소란스러운 휴가를 보내다가 모두 잠든 조용한 숙소에서 단잠을 청하던 순간처럼, 나에게서 멀어지면서 당신에게로 다가갈 것이다.


* 읽은 책 제목으로 글을 씁니다.


유일하게 와이파이가 터지던 '료칸'의 공간


<넘기지 못한 페이지>


* 제목: 게으른 게 아니라 충전 중입니다댄싱스테일


p.207 이 사회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대단한 미덕으로 삼는 것 같다. 그런데 한계라는 게 꼭 극복해야만 하는 걸까?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극복일까?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결과가 나타나면? 계속 좌절해도 지치지 않고 다시 도전하면? 어쩌면 한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에 진이 다 빠졌을 때는 쉬어 갈 줄도 아는 게 진짜 미덕이 아닐까. 좌절감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는 것. 그게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들 중 하나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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