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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 살로메 Sep 24. 2021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힘든 맘, '엄마'

얼마 전 엄마와 크게 다퉜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와 나는 한 집안에 함께 있어서는 안 될 상극과 같은 존재였다. 사람에게도 '상극'이 존재한다는 걸 엄마를 통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우면서도 내심 신기했다. 어떻게 엄마와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엄마와 저리 다정할 수 있는지. 나에게 엄마는 멀고 먼 '전설의 고향'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자비에 돌란 감독의 영화 '마미' 중 한 장면


엄마와 싸우거나 부딪치지 않을 정도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정도로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으나 그건 마치 '공상 SF소설'이나 '슈퍼 히어로 무비'같은 현실 불가능한 이야기들이었다. 나의 엄마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전업주부로서 '자식이 잘 되는 것' = 곧 '내가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였으니까. 게다가 온순하기 짝이 없는 아빠를 만나서 '동물의 왕국'의 사자처럼 남편과 자식의 마음과 행동을 제어하며 군림하고 살아왔다.


현실적으로 엄마를 통제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아빠와 나의 선택은? 엄마를 '포기'하고 그냥 온순해지는 것.

엄마의 말을 잘 듣는 '남편'과 '자식'이 되는 것.

그것이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어느 나라든지 '엄마'라는 존재는 참 어렵구나.


하지만 엄마는 나와 다툴 때면 늘 "너 같이 속 썩이는 자식 없다." "너 같은 불효녀는 없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엄마에게는 나의 존재가 '통제 불가능한 골칫덩이'일 수도 있겠다.


그런 환경 때문이었는지 나는 '여행'을 무지 좋아했다. 집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늘 '여행'에서만 가능했다. 만약, 나중에 여행작가로 성공한다면 그 공을 엄마에게 돌려야 할까? 엄마 덕분에 그렇게 여행을 다니게 되었으니까. 하.


이런 엄마와의 관계 때문인지 나는 유독 '엄마' 또는 '모성' 관련 소재의 영화나 소설을 유심히 보곤 했다. 다른 엄마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중 '엄마'에 관한 영화 중에 기억에 남는 3편이 있다. (그러고 보니 3편의 영화 모두 '딸'이 아닌 '아들'이 등장한다.ㅎㅎ)



모성애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영화 '마미'의 '디안'


1. 자비에 돌란 - 마미(Mommy)

2. 림 랜지 -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3. 봉준호 - 마더


특히 '자비에 돌란' '마미'에서의 엄마 '디안' 한국 관객들이 알고 있는 어머니 상이 아니어서 좋았다.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서와 같은 한국 엄마 캐릭터로 흘러갔다면 나는 '디안'이라는 캐릭터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생각했다. 그녀(디안)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나의 대답은 '니요.' 



림 랜지 감독의 영화 '케빈에 대하여'


림 랜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에서의 '에바'도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의 '엄마'도 모두 불안정한 인격체들이다. 완벽한 엄마가 되기란 얼마나 힘든지, 아니 어쩌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해야 할까. 엄마이기 전에 '사람'인 그녀들은 지식들만큼이나 완벽할 수 없다.


'딸'과 '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에는 완벽히 착한 딸도 완벽히 나쁜 딸도 없을 것이다.

그건 마치 '딸기 바나나 주스'처럼 적당히 섞여서 한 가지로 명확히 구분 짓기 힘든 것일 테니까. 딸기 바나나 주스는 맛이라도 있지만. 휴휴.



자유로운 여행가의 삶을 원했던 엄마 '에바'


그렇게 엄마와 갈등을 겪으며 살아오던 날, 우연히 동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


제목이 너무 끌렸다. 나에게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착한 딸 콤플렉스가 있는 나에게 이 책은 구세주와 같았다. 읽는 내내 공감할 수밖에 없었고 책의 많은 페이지를 접고 공감 가는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두세 달쯤 지났을까. 나는 이 책을 읽기 이전의 딸로 돌아가 있었다. 하긴 책 한 번 읽고 사람이 변한다면 이 세상에 '병원'이나 '상담기관' 같은 건 필요 없겠지.



좀처럼 정돈되지 않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


최근에 엄마와 심하게 다툰 나는 엄마를 당분간 보지 않겠다고 남편과 친구들에게 선언했었다. 이번에는 독하게 마음먹었다고 더 이상 엄마에게 끌려다닐 수 없다고 떠들어댔다.


그런데 어느덧 몸이 좋지 않은 엄마를 생각하며 꽃다발 주는 이벤트에 응모하고 있었고, 엄마가 쓰는 유명 한방 화장품을 주문하고 있었다. 역시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하는 걸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부모라는 존재는 '잘 해도 후회' '못 해도 후회'뿐인 존재라고 말이다.



봉준호 영화 '마더'의 한 장면


한 번씩 부모님이 돌아가실 그날을 상상해본다.

아마 그때 나는 몹시 후회할 것이다. 그건 살아계실 때 잘하든지 못 하든지 매한가지일 것이다.

또한 부모가 살아계실 때 착한 딸이든지 못된 딸이든지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실 아직도 모르겠다.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하여, 이 애증의 관계를 어떻게 풀고 매듭지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나는 여전히 사소한 일에 엄마가 밉고 엄마에게 연민을 느끼고 엄마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아마도 이 복합적인 감정과 관계는 누군가 하늘나라를 떠나도 계속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나 여전히 착한 딸이 되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나와 엄마의 비극적인 그리고 희극적인 '서사'인지도 모르겠다.


* 읽은 책 제목으로 글을 씁니다.



넘기지 못한 페이지


* 제목: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 ㅣ 아사쿠라 마유미, 노부타 사요코


p.155 눈앞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죄송하다'라고 하지 마라


엄마와의 관계로 괴로워하는 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주 듣는 말이 '엄마가 약한 모습을 보일 때 심한 죄책감이 든다'는 이야기입니다. 딸이 어린이 되어갈수록 엄마는 나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몸과 마음이 약해졌음을 느끼는 순간, 엄마를 쇠약하게 만든 사람은 자신이 아닐까 하고 죄책감에 빠지는 딸이 많은 듯합니다.


설령 엄마가 '네가 00해 주지 않아서'라며 약해진 심신을 딸의 탓으로 돌린다고 해서 그 말을 곧이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엄마는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야 할 딸이 뜻밖에도 강하게 나오면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이며 상황을 살피기도 합니다. 그럴 때 엄마에게 쉽게 '죄송해요'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엄마의 허약해진 심신은 흐르는 세월 탓이지 결코 딸인 당신의 탓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엄마의 불편한 심기는 엄마의 문제이고 딸의 불편한 마음은 딸의 문제일 뿐, 그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중략)


엄마에게서 무뚝뚝하다고 질책을 듣는다면 마음속으로 '엄마, 저는 다정다감한 딸이 아니에요' 하고 선언하세요. 이제 '다정다감한 딸'은 필요 없습니다. '상냥한 딸'은 벗어던지고 '행복한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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