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한 생각
얼마 전 <2024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발견해서 메모해 두었다.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는데 그럴 때면 작품성 있는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는 글을 쓰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글은 얼마나 쓸쓸한가. 글은 마치 비밀을 폭로하기 위해. 그리고 홀로 있지 않기 위해 쓰이는 것 같기도 하다.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사랑받는 글을 쓰는 작가는 얼마나 행복할까. 나는 아직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해서 상상만 해볼 뿐이지만. 단 한 명이라도 읽어주는 이가 있다면 끝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써봐야지 다짐해 보게 된다.
p.71 쓰기와 읽기를 매개로 한 내밀한 소통
그러니까 재서에게 미용의 존재가 의식되기 시작한 계기가 바로 우연히 읽게 된 그녀의 글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달라졌다. 뭔가를 읽는다는 일은 그랬다."(36쪽)고 재서는 느낀다. 한 사람이 쓴 글을 읽는 경험은 직접적인 대화와는 다른, 어떤 측면에서는 더 깊은 소통의 순간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을 읽는 일을 매개로 한 변화는 재서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쓴 글을 재서가 읽었다는 사실은 미용에게도 그 상대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무튼 재서가 알기로 미용은 그 후로 자신을 좀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 듯하다. 재서가 미용의 글을 읽고 그녀를 그 같은 눈으로 보게 된 것과 비슷한 것이었을까."(38쪽)라는 대목에서는 쓰기와 읽기를 통해 발생한 두 사람의 관계의 변화가 재서의 관점으로 포착되고 있다. 모리스 블랑쇼는 "작품이 그것을 쓰는 자와 그것을 읽는 자의 내밀함이 될 때라야만 작품이 작품으로 되는 사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상황을 '작품의 고독'이라 부른 바 있다. 글을 매개로 한 소통은 본질적으로 그처럼 쓰는 자와 읽는 자 각자의 고독을 조건으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용이 남모르게 혼자 쓴 글을 재서가 읽게 된 일은 두 사람의 내밀함이 맞닿아 이루어진 일종의 '문학적' 사건이었던 셈이다.
미용이 남긴 글로 인해 재서는 그녀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중단된 탓에 아직 모르는 것들을 더 알고 싶게 만드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은 "문을 반만 열어주고 안을 보게 해 주었다가 다 보기도 전에 탁 닫아버린 것처럼"(22쪽) 재서로 하여금 애가 타게 만든다. 재서의 내부에서는 미용에 대해 '신경 쓰이는 부분'과 '냉담한 부분'이 뒤섞여 교차한다.
p.78 '일러두기'는 책의 본문은 아니지만 그 앞에 놓여 어떻게 그것을 읽어야 할지 안내해 주는 기능을 하는 장치이다. 텍스트의 내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외부도 아닌, 제라르 주네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파라텍스트paratext'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곁텍스트'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그것은 텍스트로 진입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해석의 입구 역할을 한다. 한편 데리다는 회화의 진리에 대해 논의하면서 칸트가 구분한 에르곤ergon과 파레르곤parergon의 관계를 해체하는 한편 비판적으로 재정립한 바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그림을 장식하는 액자등을 예로 들 수 있는 파레르곤은 그 내부의 본질(에르곤)을 감싸는 부속물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에르곤의 결핍을 보완하는 대리보충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때 파레르곤은 곧 para-ergon이니 그것을 서사에 적용하면 제라르 주네트의 para-text에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논의를 경유하면서 글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놓여 두 세계를 이어주는, 그리고 때로는 글 내부의 결핍을 보충하기도 하는 '일러두기'의 기능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