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 살로메 Mar 15. 2022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ㅣ 내일

영국의 아름다운 해안 절벽이 있는 Hope Gap


여기 와본 적이 있다

언제, 어떻게인지 모르지만

문 뒤편에 있는

풀밭을 안다

달콤한 향기

탄식의 소리

해안 주변의 불빛

당신은 내 것이었다

얼마나 오래전인지 모르지만

제비가 비상하는

바로 그때

당신은 그렇게 고개를 돌렸고

장막이 내려졌지

난 오래전

모든 걸 알았어

전에도 이런 모습이었던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섬광' 중에서>



시를 엮은 책을 만드는 '그레이스'


(이 글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함께 오래 살아왔고 그래서 서로를 잘 안다고 믿게 되는 단계는 언제쯤일까.

연인관계와 부부관계에서 그런 단계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려고 영화관에 들어갔지만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삶을 살아간다는 건 늘 희망만 가득한 일은 아니며 내 의지대로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걸 영화는 말해주고 있었다.


'다름'이 있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노부부인 '그레이스' '에드워드'는 너무도 다른 성향을 지닌 채 오랜 시간 부부로 함께 살아왔다. 시를 엮어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아내 '그레이스'는 직선적이고 감정적이다. 반면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남편 '에드워드'는 내성적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신중하다. '에드워드'는 최선을 다해 아내에게 호응하고 맞춰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런 부부의 한때 사랑으로 태어난 평범한 아들 '제이미'가 있다.

영화는 해안절벽이 아름다운 영국의 'Hope Gap'에서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는 '제이미'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혼을 앞둔 부모님 때문에 흔들리고 아파하는 '제이미'


모든 게 평범해 보이는 가정. 특별할 것도 유별날 것도 없어 보이는 이 가정에 작은 '틈'이 생겨난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이 '에드워드'는 아들과 아내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떠나기 위해 짐을 싼다.


아버지의 고백이 갑작스럽고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리 미워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공평하게 '그레이스' '에드워드' 그리고 '제이미'의 시선과 심정을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게 담아내고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얼마큼 견뎠는지. 왜 떠날 수밖에 없는지. 이런 '틈'이 생겨났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선량하고 인내심 많아 보이는 그였지만 결국 떠날 결심을 한다.


'그레이스'는 떠나려는 '에드워드'를 말려도 보고 설득도 해보지만 그의 마음은 확고하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음의 준비 없이 오롯이 홀로 이 시간을 견뎌나가게 된다.


미칠 것 같은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 샘솟고,

어느 날은 조금 평정심을 되찾은 듯도 보이지만 또다시 분노는 그녀 가슴속에서 솟구친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들 '제이미'.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제이미는 알고 있었던 걸까. 아버지를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아버지 또한 어머니와의 '다름' 속에서 오랜 시간 노력하고 고뇌하였다는 걸. 그리하여 아버지를 이제는 이해하고 그의 선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그가 자신의 길을 가도록 놓아주어야 한다는 걸.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결코 쉽지 않을 것이기에.


제이미는 친구들 앞에서 부모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늘 자신의 부모님이 강한 존재로 남아있기를 바랐지만 그들 또한 불안정한 한 인간일 뿐이라는 걸.

서서히 받아들이고 깨닫게 된다.


종종 아버지를 만나 안부를 전해 듣는 아들 '제이미'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은 찾아올까?


남편과 헤어진 후 괴로울 때마다 'Hope Gap'을 찾는 '그레이스'는 아슬하면서도 아름다운 그 희망의 틈에서 '절망'을 발견할 뿐이다. 당장이라도 뛰어내리고 싶은 표정으로 그녀는 서 있다.


이 고통의 끈을 놓아버릴지.

계속 붙들고 살아갈지.


그녀는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금방이라도 삶을 놓아버릴 것 같은 어머니를 설득하는 '제이미'


'해피엔딩'이란 무엇일까.

모든 '다름'을 어떻게든지 극복하고 함께 보듬으며 살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지금 당장은 아프더라도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일까.


어떤 경우가 해피엔딩인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건 삶을 살아내는 자세와 노력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하지 않고 길을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두렵기만 했던 거대한 절벽의 틈에서 따스하고 눈부신 빛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절망'과 '희망'이 함께할 것만 같은 'Hope Gap'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사랑을 준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은 주고받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고받는 그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아무리 다가서도 얇은 빈틈이 생깁니다. 전위적인 화가 마르쉘 뒤샹은 그것을 '앵프랑맹스 inframince'라고 불렀습니다.


- 지성에서 영성으로ㅣ 이어령 -


이어령 교수님은 어린 시절 이마를 짚어주던 어머니의 손에서 이 얇은 빈틈을 느꼈다고 말씀한다. 인간은 그리하여 영원히 혼자일 수밖에 없다고. 인간은 그것을 깰 수도 찢을 수도 넘을 수도 없다고.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던 시간들


영문학을 전공한 감독답게 영화는 굉장히 문학적이고 대사 또한 많다. 영화의 원작은 희곡 'The Retreat from Moscow'라고 하는데 희곡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순도 높은 문학작품을 읽은 것 같아서 가슴이 먹먹하고 잔잔한 울림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화려하지 않은 그저 평범한 영국의 시골 마을, 티백 차를 손으로 우려 마시고 아들이 찾아오면 기뻐하고,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다가 언성을 높이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 그들에게 찾아온 이별.


비록 지금은 완전히 모든 걸 극복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영화 속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시 '섬광'의 첫 구절처럼 누군가 '여기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 왠지 위로가 된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시간은 홀로의 시간이지만 '그레이스의 시간' 위에 '에드워드의 시간'이 그리고 '제이미의 시간'이 포옹을 하듯이 놓여있다.


'앵프랑맹스 inframince'


우리는 서로의 얇은 막을 뚫지 못하나 목소리로 이야기할 수는 있지 않을까.


'Hope Gap'

'여기 희망의 틈이 있다'

'그 틈을 본 적이 있다'라고.


그리하여 너와 내가 ‘여기 와본 적이 있다.'라고.



* 마침 오늘 받은 클래식 레터의 곡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내일 (Richard Strauss - Morgen)'인데 이 영화와 너무 잘 어울리는 곡 같아서 부제로 사용하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네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