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하면 안 되겠니?
(스포일러 있음)
오래전 영화관에서 관람한 '레오 카락스' 감독의 '홀리모터스'가 좋아서 이번에 개봉한 그의 영화 '아네트'를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배우 '마리옹 꼬띠아르', '아담 드라이버'가 출연하여 더더욱 궁금하기도 하였다. 영화 '아네트'의 분위기는 동화적이면서 환상적인데 그러면서도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하다. 주인공 안(오페라 가수)과 헨리(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사랑'처럼 달콤하고 로맨틱하면서도 파괴적이고 공포스러운 영화라고 해야 할까.
영화에 대하여 잘 모르는 나이지만 '아네트'를 보면서 유독 영화 '홀리모터스'와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공통점은 바로 '모터' '바퀴' '질주'인데 영화 속에 내재한 '죽음'과 대조적으로 역동성,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더 나아가서는 폭력적이고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생각해보면 삶이라는 것 자체가 반대되는 어떤 성향들과 공존하면서 '순환'하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난번 '사랑의 단상' 글에도 잠시 이야기했듯이 '사랑'이라는 감정과 행위 또한 그렇게 아름답고 선한 것이라고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의 양태라는 것이 한 사람의 타고난 성향, 자라온 환경, 지속된 관계 등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것이고 자신은 자신의 방식으로 온 힘을 다해 사랑해도 왜곡되거나 변형될 수 있다.
이 영화 속 주인공 '헨리'의 사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사랑의 방식이 아니다. 그는 '안'을 사랑했지만 내면적 성향과 주위의 환경 때문에 폭력적인 사랑의 결말을 맞는다. '헨리'의 아내 '안'은 영화 중반쯤이 되면 이런 노래를 한다. 정확한 가사를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맥락의 노래였다.
'나는 그를 잘 알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꼭 한 번쯤 찾아오지 않나. '이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을까?' 무언가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 그런데 당연한 것 아닐까. 나 자신도 모르는데 내가 아닌 당신을 어찌 알겠는가. 그런 '안'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헨리'는 '안'을 살해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혼이 되어 딸에게 들어간다.
하지만 '헨리'는 그런 딸 '아네트'의 목소리를 이용해 전 세계 투어를 하며 돈을 벌기까지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는 함께 투어를 하던 지휘자까지 살해하게 되고 딸 아네트는 자신의 방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아네트는 결국 노래하는 것을 멈춘다.
'너를 사랑하면 안 되겠니?'
모든 사실이 밝혀진 후 헨리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그 결과로 감옥에 갇혀 지내는 아빠 헨리는 면회 온 어린 딸 '아네트'에게 간절하고 처절하게 묻는다.
(이 장면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영화 속에서 '목각 인형'으로 표현되었던 딸 '아네트'가 처음으로 '사람'의 형상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아빠 '헨리'는 다시 한번 딸에게 묻는다.
'너를 사랑하면 안 되겠니?'
그러자 딸 아네트는 단호하게 답한다.
'안돼요.'
'아빠는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어요.'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기에 상대방에게 사랑을 거부당한 '헨리'는 좌절한다.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삶이라니. 이처럼 비참한 삶이 또 있을까. 영화 초반부에 힘차게 바이크를 타고 질주하던 '헨리'의 모든 것은 영화 끝에 가서 멈춰버린다.
'사랑'은 하나의 상징일지도 모르겠다.
멈추지 않고 사랑하고 노래하고 관객을 웃길 수 있는 삶.
그 모든 삶은 헨리에게서 떠나간다.
그는 어떤 심연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될까.
나는 이 영화를 보며 가라앉고 멈춘 것들을 생각하였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지 못한 마음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