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찍으면 생각한 것
얼마 전 '칸 국제영화제'에서 영화 '브로커'의 송강호 배우가 남우 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수상 여부를 떠나 좋아하는 배우들이 많이 출연한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었고 남편과 함께 관람하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 캐릭터에 명확한 선과 악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도스토프예프스키 소설 속 인물들처럼 언제나 한 캐릭터 안에 그것들은 양면처럼 내재해 있다.
그런 면에서 배우 '송강호'가 지닌 힘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와 더욱 잘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상현(송강호)이라는 인물이 한없이 포근하고 다정해 보이기도 하다가 순간순간 섬뜩할 정도로 살기가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이런 입체적인 배우를 어느 감독이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영화가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어느 부분에서는 다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표현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다소 인위적이라는 느낌과 픽션이라는 느낌이 도드라진 듯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싫었다거나 별로였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소영(아이유)이 동수(강동원)와 상현(송강호)에게 자신이 베이비 박스에 버린 아이의 친부를 살해했다고 고백한 후 동수와 상현의 태도같은 것. 그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았는데. 그래서 영화 관람 후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나: 소영이 아무리 연약해 보이는 여자라지만 만약 함께 동행하던 모르는 사람이 자신이 살인자라고 고백하면 어떻게 할 것 같아? 무섭지 않을 것 같아?
남편: 무섭지. 얼른 도망가야지. ㅎㅎㅎ
하지만 영화 속 동수와 상현은 어떻게 저리 태연할 수 있는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르는 어떤 이가 자신이 살인자라고 고백할때 보통 공포를 느껴 그 사람을 멀리하거나 달아나지 않을까. 사람마다 다르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볼 때면 내 안에 여러 질문(의문)들이 생겨나고 지금 삶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단순히 분노를 느끼거나 슬픔을 느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꾸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가 지닌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 몇 해 전 감독이 출간한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을 읽었는데 그 안에 어찌나 배움이 되는 내용들 많던지! 책을 읽는 내내 나 또한 영상 관련 일을 해온 사람으로서 감탄과 반성과 깨달음의 시간을 보냈다.
과연, 대한민국 방송사 직원 중에서 이토록 깊이 고민하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영상을 촬영, 편집하는 연출가가 있기나 한 것인지. 몹시 부끄러웠다. 또한 어떤 정상의 위치에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의 결과물인지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노력 없이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 없으며 오직 갈고닦음만이 훌륭한 작품을 남긴다는 것을. 영혼 깊숙이 새기고 또 새겼다.
하지만 실천의 차이일까.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 것이며 그 실천이 쉽다면 이름을 휘날리지 않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의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을 읽으면서 나의 지난 시간과 지금 현재의 시간을 반성하고 또 반성하게 되었다.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기 힘든 요즘, 책으로나마 훌륭한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물론, 영화로도 만날 수 있어서 기쁘고!
p.190 <아무도 모른다>는 기본적으로는 이런 태도로 찍기로 결심했습니다. 알기 쉬운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가 아니라 회색 그라데이션으로 세계를 기술하려 했습니다. 영웅도 악당도 없는 우리가 사는 상대적 가치관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중략)
"영화는 사람을 판가름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며 감독은 신도 재판관도 아닙니다. 악인을 등장시키면 이야기(세계)는 알기 쉬어질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관객들은 이 영화를 자신의 문제로서 일상으로까지 끌어들여 돌아갈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요...."
p. 252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종종 '영상은 자기표현인가 메시지인가'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적어도 저는 다큐멘터리로 시작했기 때문에 작품은 결코 '나'의 내부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나'와 '세계'의 접점에서 태어난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영상은 카메라라는 기계를 거치므로 이 부분이 두드러집니다.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세계와 만나기 위해 카메라를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다큐멘터리의 기본이며, 그것이 픽션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요.
앞서 말한 요시노 히로시 씨의 시에도 쓰여 있듯 '사람은 원래 결여를 품고 태어나 그것을 타자로부터 채운다'는 인간관은 영화철학으로도 저와 매우 잘 맞습니다.
p.381 아이도 어른에게 그런 존재입니다. 아직 완전히 사회 일원이 되지 않은 아이의 눈을 통해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비평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제 이미지로는 과거, 현재, 미래를 세로축에 놓으면 죽은 자는 세로축에 존재하며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를 비평하는 존재, 아이는 같은 시간축에 있지만 수평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비평하는 존재라는 느낌입니다.
저의 영화에 죽은 자와 아이가 중요한 모티프로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이 두 존재로부터 사회를 바깥에서 비평하는 시선을 느끼기 때문이겠지요.
-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ㅣ 고레에다 히로카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