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속 딸기 바나나주스
한참 MBTI라는 게 유행했었다. 지금도 유행이려나. 사실 난 MBTI에 관심이 없다. 20살 초반인가 MBTI를 처음 테스트해 봤을 때 나의 성향은 E(외향)였고 그 후에도 언제나 변함없이 E(외향)를 유지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외향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0대를 훌쩍 넘어서면서부터는 철저하게 I(내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한 건 전혀 낯을 가리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참 방송작가로 일하던 시절에도 나는 낯을 가리지 않았다. 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쉽게 말을 건넸고 매주 섭외를 했다. 모르는 곳에 다짜고짜 전화를 해서 출연자를 수소문하고 연락처를 물어보고 정중하게 방송 출연을 부탁했다.
사람에게 너무 지쳤던 걸까. 언제부터인지 혼자 여행을 떠났고 혼자 영화를 봤고 혼자 차를 마시고 혼자 밥을 먹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솔직'해졌다. 한마디로 사회성이 떨어져 갔다는 이야기이다. 몇 해 전에는 한 방송사에서 만드는 웹툰(인스타툰)의 콘티 작가로 일을 했는데 그곳에서의 생활이 정말 힘들었다. 일은 재미있었지만 함께 일하는 상사, 동료와 성향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새로 입사했던 신입 PD는 아부에 능했다. 얼굴도 미인이었고 학벌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 그녀였지만 상사에게 늘 아부를 하고 애교를 떨었다. 옆에서 통나무처럼 가만히 있는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비칠 정도였다. 그녀의 권모술수 강도는 점점 높아졌다. 상사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예뻐했고 나를 미워했다.
직장생활이라는 게 어쩌다 이렇게 변질되어 버린 것일까. 아니 어쩌면 직장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조금 이상한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비효율적인 일과 감정을 쏟느라 정작 집중해야 할 일에 힘을 쏟지 못하는 경우도 자주 생겨났다. 신입 PD였던 S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였지만 회사에서 끊임없이 상사의 비위를 맞췄다.
내 눈에 그녀는 명백히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아직도 성공이 무엇인지 모른다. 성공한 사람들이 정말 실력을 인정받아서 그렇게 된 것인지 어느 정도의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인간관계를 잘해서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 전부를 잘했기 때문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지 성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성공을 포기하고 그냥 나대로 살고 싶다. 한 명을 만나더라도 가식적이지 않은 진실된 마음으로.
얼마 전 영화배우 '김혜수'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우연히 SNS에서 보았다. 그녀는 MC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밥 한번 먹자고 하면 정말 그 사람한테 호감이 가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정말 밥 먹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전 그냥 밥 먹자는 말 안 해요.'
문득 몇 주 전 남편에게 만들어준 딸기 바나나주스의 얼음 속 딸기가 생각났다.
얼음 속 딸기.
얼음 속 딸기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겉은 달콤한 딸기로 포장하고 있지만 막상 안은 금방 녹아 없어지는 차가운 얼음으로 가득한 사람도 많으니까.
겉과 속이 다른 사람.
난 차라리 이 날의 딸기 바나나 주스처럼 얼음인 줄 알고 먹었는데 안에는 달콤한 딸기가 숨어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겉에는 아부 없는 무뚝뚝함으로 가득하지만 안은 진심으로 꽉 찬 사람.
얼음속에 변하지 않는 진심 한웅큼이 새빨갛게 자리하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