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김경일 씨의 2013년 작. 여러 심리학자들이 던졌던, '인간은 왜 종종 불합리한 의사결정을 하고야 마는가?'라는 질문을 저자 역시 던진다. 인간은 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고를 하고, 그 사고를 기어이 행동으로 옮기고야 마는 걸까?
저자는 결국 모호하고 불확실한 상황이 선사하는 '불안' 심리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인간은 가장 원치 않는, 무엇보다 싫어하는 심리 상태인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에게 잘 알려진 것, 또는 자신이 예상 가능한 것을 선택하거나 추구하여 불안감을 감소시키기를 원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고. (24 페이지)
그리고 이때, 본능에 따라 보다 리스크가 없는 확실한 것을 취하거나 선호하지만 이런 결정은 올바른 판단으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얘기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은 원래 '인지적 구두쇠'이기 때문이라고. '인지적 구두쇠'란 표현이 재밌다. 어떤 의미일까? 몸이 소모하는 전체 에너지의 자그마치 12%를, 고작 체중의 2%에 불과한 뇌가 소모한다고 한다.
그게 어쨌다는 걸까?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 하루 먹고살기도 힘들었을 것이 뻔한 원시 인류는 당연히 힘들게 얻은 에너지가 허투루 (사색, 고찰 따위에) 쓰이는 상황을 싫어했을 것이며, 그들의 후손인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
하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서 읽지 않았음에도 읽은 듯한 착각을 줬던 '총, 균, 쇠'는 '식량 생산'이 인류의 운명을 바꾼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얘기한다. 생산자가 모두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부터, 즉 동물적인 생존이 보장되면서부터 정치나 전쟁은 물론이고, 사색∙고찰 등의 잉여 짓이 가능해졌다는 것.
잉여 식량이 있으면 왕이나 관료 이외의 전업식 전문가들도 부양할 수 있다 - 총,균,쇠 (124 페이지)
그렇다면 이제 먹고 살만해진(?) 인류는 12% 정도의 에너지 낭비에 대해 너그러워지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원시 인류의 DNA를 그대로 물려받은 인간은 여전히 깊고 복잡한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피하려 한다고. 머리에 좋은 거 먹어봐야 헛수고
암흑을 무서워한 덕분에 짐승의 밥이 되지 않았고, 먹고사니즘과 관계없는 에너지의 낭비를 싫어한 덕분에 살아남은 원시 인류의 DNA가 전해지는 바람에 문명을 이룬 현대인조차 무슨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위험에 대한 공포, 즉 불안한 상태를 못 견뎌하고, 그러면서도 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복잡한 사고 역시 못 견뎌한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먹고사니즘과 관계없는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고, 하루에도 수백 개의 결정과 그에 따른 행동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됐다. '인지적 구두쇠'는 '인지 과부하' 상태를 어떻게 해결할까?
인간은 살아오면서 체득한 지식과 경험을 이용해서, 현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선택을 재빨리 거름으로써, 적합한 선택을 순식간에 판단하고 결정하는 '경험적 의사결정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97 페이지) 그 방법론이 바로 '휴리스틱(heuristic)'. 컴퓨터, 특히 정보보안 분야에서 많이 쓰이는 그 용어 맞다. 원래 심리학 용어였던 것. 고도의 컴퓨터 기술인 줄 알았는데(..)
한마디로 '생각에 관한 생각'의 대니얼 카너먼과 '인튜이션'의 게리 클라인이 강조했던, 일반적으로 유용하지만 항상 오류의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한 '직관'의 다른 이름이 바로 '휴리스틱'. (자라보고 놀란 경험은 두번째 자라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지만, 솥뚜껑 보고 놀랄 가능성 역시 높아진다.)
직관, 즉 휴리스틱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인지적 구두쇠'임을, 즉 내 생각과 판단이 불완전할 수 있음을 먼저 인정한 후, '불안-> 정서-> 동기(동기가 다시금 만들어내는 정서)-> 인지->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는 의사결정∙실행 과정 중 '동기'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동기의 방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
동기는 다시 좋은 것에 가까이 가기 위한 '접근동기'와 좋지 않은 것에서 멀어지기 위한 '회피동기'로 나뉘며, 사람들은 저마다 두 가지 중 하나를 중심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부모님의 칭찬, 기쁨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것은 '접근동기', 혼나지 않기 위해, 안도감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것은 '회피동기'가 작용한 셈. (116 페이지)
"현재까지 해온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는 다른 측면에 주의를 뺏기지 말아야 한다. 회피동기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기대한다면 문제 공간을 넓게 보고 다른 방식의 시도를 이끌어내야 한다. 접근동기가 필요하다." (150 페이지)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접근동기와 회피동기를 설명한다. 일단 제시된 사례나 어감에서 '접근동기'는 긍정적, '회피동기'는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저자는 접근∙회피동기가 상황과 잘 어울리면 좋은 결실을 맺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실수와 오류가 발생한다며 정서(감정)를 고려한 적절한 선택과 조화를 강조한다.
의사결정 및 실행의 큰 틀에서 결정의 순간까지는 거시적 관점의 접근동기, 구체적이고 치밀한 실행 시점에서는 미시적 관점의 회피동기가 필요하다고.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한 접근동기는 시간이 지나 '그날(D-day)'이 다가옴에 따라 그 역할이 끝난다. 접근동기는 점차 회피동기로 바뀌어야 한다." (168 페이지)
"(접근동기에서 비롯된) 모든 비전이나 청사진은 완성될 때까지 수많은 하위의 지엽적 목표가 필요하다. 일이 진행됨에 따라 그에 걸맞은 회피동기로 움직여야 한다." (169 페이지)
한마디로 숲(접근동기)과 나무(회피동기)를 동시에 보라는 것. 그러나 둘의 비교우위를 논하기 어렵다는 저자 역시 둘 중 하나, 특히 회피동기에만 집중되는 상황은 위험하며, 경쟁과 불안이 극심할수록 최악의 결과를 피하고자 하는 회피동기가 더 강해지고, 회피동기가 강해질수록 경쟁과 불안의 가속 역시 더 심화된다고 경고한다.
"회피동기가 사회적으로 지나친 지배력을 가지면 무언가를 바라고 성취하려는 성향보다는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의 방지에만 너무 많은 힘을 쏟을 수 있다." (181 페이지 )
성취보다는 방지에 민감한 사회, 회피동기가 지배하는 사회는 복지부동과 무사안일로 흐르기 쉽다는 뜻일 것이다. 결국 저자는 근본적인 변화는 '왜(Why)'로부터 시작한다며 접근동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접근동기가 앞서고 회피동기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
"접근동기가 '왜'에 대한 생각과 맞물려 제시하는 미래의 비전은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헤쳐나갈 힘을 갖게 한다. 동시에 회피동기가 '어떻게'라는 세부 실행 계획을 세움으로써 비전을 완성해나간다." (185 페이지)
생각의 작동 원리는 대충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원리를 알았다고 해서 개선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오랫동안 일상∙반복적 지식, 즉 고정관념(휴리스틱)을 이용해서 빠르고 쉽게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보상받는 사회에서 살아 왔으며 변화도 싫어한다. 어떻게 하면 내 생각, 내 사고 능력을 계발할 수 있을까?
저자의 처방은 일기 쓰기와 인문학 독서.
"일상에서는 끊임없이 '어떻게' 위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실수를 범하기 쉽다. 그래서 깊이 있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인생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항상 찾기 원하지만, 그 방향에 대해 숙고할 시간을 갖기란 힘들다. 그래서 일기를 써야 한다." (184 페이지)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을 관련지어 문제를 해결하는 정신 과정 - 유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연결하는' 은유... 인문학 도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다양한 은유를 접할 수 있기 때문" (205 페이지)
저자의 말에 의하면 특히 시를 많이 읽을수록 수준높은 은유를 경험할 수 있으며, 은유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지식을 재구성하는 유추의 달인이 될 수 있고, 생각이 지닌 작동원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시는 취미 없는데
결국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얘기다. 다 아는 얘긴데 왜 잘 안될까? 문명의 발달 덕에 최소한 굶어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이니 먹고 살기 바빠서란 변명은 통하지 않을 듯하다. 최악의 결과만을 피하려다 회피동기에 함몰돼버린 걸까? 미래의 행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현재의 행복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
기억에 남는 문구를 남긴다.
"무언가 기억해낸다는 것은 있었던 무언가가 아닌, 있었던 무언가에 대한 '나의 이해'를 끄집어내는 것" - 기억은 왜곡될 수 있다? (92 페이지)
"오래 생각하기를 즐기는 분야... 실패했을 때 그 실패를 바라보는 관점이 유난히 도전적이면서 발전적인 분야에 적성이 있다." (104 페이지)
"삶의 목표를 설정할 때는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단순히 자기계발서에 적힌 바를 그대로 추종하는 것은 이미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172 페이지)
"지식의 축적이 아닌 '재구성'에 독서의 목적이 있다." (205 페이지)
"설명할 수 없으면 아는 것이 아니다" - 공돌이 버전: 숫자로 말할 수 없으면 모르는 것 (232 페이지)
"돈은 불행을 막아줄 뿐" - 회피동기만 작동 (254 페이지)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쾌락을 희생시킬 줄 아는 지혜'와 '현재의 행복을 무시하는 어리석음'을 구분하라" (266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