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솔 Nov 17. 2019

그리고 나는 여전하다

정신과 치료도 받았고, 책도 쓰고, 러닝도 하며 남미도 다녀왔다.


정신과 치료도 받았고, 책도 쓰고 있고, 러닝도 하며, 남미도 다녀왔다.

그리고 나는 여전하다.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하는 언니가 있다. 나의 유년 시절에는 없었던 ‘언니’라는 존재를 대학생 때부터 풍족하게 채워주던 그녀.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시도하고 있는 요즘의 나를 두고 그녀는 특유의 다정한 말투로 이렇게 얘기했다.

너 요즘 진짜 멋있어.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하고 있잖아.


 한정된 공간에서 친한 사람들과 예측 가능한 일만 했던 대학생의 이솔. 그녀가 매일 봐왔던 나의 모습은 그러했으니, 지금 나의 모습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찔릴 만큼 나를 잘 아는 그녀는 이렇게도 얘기한다.

그래도, 솔이는 마음이 약하니까. 이제 사람을 잘 사귀어야 해. 알지?

역시 언니는 아는 것이다. 표면적인 행동과 주변 환경은 변했어도, 이솔 자체는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예전에 나는 ‘밑 빠진 독’이었다. 친구들이 애정이 어린 시선을 보내도, 내 곁에 있던 연인이 아무리 잘해주어도, 내 가족이 날 얼만큼이나 사랑하는지 알아도 항상 불안에 떨던 항아리였다. 사랑을 받고 받아도 부족했던 밑 빠진 독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구멍을 더 크게 만드는 꼴로 사랑을 갈구했었다. 그럴수록 내 온전한 몸뚱어리가 망가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항아리는 이제야 자신의 조각을 찾아가며 밑 빠진 구멍을 채워가고 있다.


 아직 모든 조각을 찾지 못한 밑 빠진 독은 여전히 계절이 바뀌는 순간이 오면, 누구보다 빠르게 몸이 아프고 우울해진다. 그렇게 사계절을 모두 탄다. 비가 와도 쉽게 컨디션이 안 좋아지고, 우울감에 종일 누워있는 날도 있다. 여전히 타인의 시선을 민감하게 신경 쓰고, 내 가족에게는 한없이 약해서, 그들이 나에게 상처를 주어도 쓴소리 한 번 하기가 어렵다.


 그런 나에게 딱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이런 내가 꽤 맘에 든다는 것이다. 내 삶의 모양이 맘에 들어서 계속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동그랗고 못생긴 얼굴에 나이가 들면 주름도 추가가 못생긴 상태로 살아온 내 인생을 더 고달프게 만들지 않을까 겁을 냈는데, 이제는 주름 따윈 걱정 없이 환하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비 오는 날 뜬금없이 우울해져도 떡볶이에 순대와 맥주를 곁들이며 포만감에 잠이 들고, 다음날 땡땡 부은 얼굴로 일어나도 어휴, 상당하다. 라는 감탄사를 뱉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게 그 모든 일을 겪고 나에게 나타난 딱 한 가지 변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아낀다고 말하는 모든 이가 제일 무섭다. 여전히 그들이 주는 나의 평범한 행복이 깨지는 것이 제일 두렵다. 하지만 이제는, 행복은 완벽한 것이 아니며 그 뒤에 반드시 뼈아픈 순간도 올 것이라는 ‘불완전을 준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더불어 아픈 순간이 오면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호감이 가는 이성을 두고 어찌할 줄 모르는 나에게 언니는 언제나 이야기한다.

솔아, 너는 좋은 사람이라서 정말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야 해. 곁에 좋은 사람을 두어야 해.

 날 아낀다고 말하는 또 다른 친구는 다시 이별한 나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그 남자랑 헤어진 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냥 교통사고 같은 거지. 초록 불에 손까지 들고 건너도 당할 수 있는 게 교통사고야. 그게 교통사고를 친 놈 잘못이지, 당한 사람 잘못은 아니잖아.

그리고 세상에서 날 가장 많이 사랑한다고 확신하는 우리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정도면 다행이다. 라고 생각해보자. 원래 행복한 일이 있으면, 불행한 일도 당연히 따라온다고 생각해야 해. 행복에 취해서 그 상태로 멈춰있으면, 신은 꼭 이놈이 잘살고 있나 확인하러 오신다. 힘든 일이 생기면 그렇게 생각해. 아, 내가 잘살고 있나 확인하러 오셨구나.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하고.


예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이 이제는 들린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평범함을 꿈꾸느라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나의 사람들의 말이 이제는 들린다. 그래. 이게 행복이지. 어느덧 나는 행복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꽤 잘 크고 있다고, 내 꿈은 죽을 때까지 잘 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만으로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