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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Oct 23. 2019

저마다의 속도

이제는 ‘누군가보다 잘한다는 것’이 딱히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오고 있다

 이제 나는 몸이나 마음이 아프다고 해서 다음날의 전원을 완전히 차단할 수가 없는 ‘직장인’이다. 전날 무슨 일이 있었든 상관없이 다음날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거나 동화책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성대모사를 해야 하고, 술래잡기 심판을 봐야 한다. 병원에 다녔을 땐, 약을 먹거나 병원에 연락을 급하게 하여 상담을 하는 식으로 해결했는데, 어느 순간 크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운동복을 챙겨 나가게 되었다. 그쯤부터 병원도 자연스럽게 발길을 끊었다.


 아마 그때부터, 취미가 무엇이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러닝을 이야기하게 된 것 같다. 뛰기 시작하면 낯선 바깥의 공기가 한꺼번에 들어오고 내 안의 급한 숨이 나간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고 나면 허벅지가 뻐근해져 오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때쯤, 속도가 나기 시작하면 땀이 흐르고 이내 곧 식는다. 뛰는 와중에 걷거나 멈추면, 아무리 추운 날에도 땀은 엄청난 기세로 흐른다. 그 순간, 아차 싶어서 다시 뛸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러닝을 마치고 나면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든 상관없이,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까무룩 잠이 든다. 그건 일단 내일 생각하고, 일단 힘들어 죽겠으니까 누워야겠다는 생각만 든다. 이건 나에게 최고의 처방전이었다.


 하루는 이 ‘러닝 찬사’에 대하여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도 러닝을 시작했다며 자신이 속한 러닝크루를 소개해줬다. 그 덕분에 러닝이 취미라면서요? 물어오는 사람들과 함께 뛰게 되었다.


 나와 같이 급한 숨쉬기와 땀이 식고 마르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니. 기대에 가득 차 시작을 했으나, 막상 뛰는 내내 내딛는 걸음이 부자연스럽고, 몸을 스치는 속도감이 익숙하지 않았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라가기엔 다리와 심장이 버티질 못했고, 뒷사람을 챙기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면, 그것 나름대로 나중에 뛸 때 더 힘이 들었다.

이건 내 속도가 아니야.

러닝크루를 소개해준 친구에게 더는 그곳에 나가지 못하겠다고 얘기했다.




 어렸을 적에는 모든 것이 생생한 날 것이라, 욕심을 내어 속도를 내어도 괜찮았는데, 잠시 쉬어도 다시 뛰는 게 쉬웠는데, 이제 더는 내 몸과 마음이 예전의 그것이 아니라서, 나의 속도가 아니면 모든 것이 버티기가 힘들다. 더구나, 나는 요령 있게 버티는 사람이 아니다. 무작정 숨을 헐떡이며 당겨오는 다리로 무리하게 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아서 어쩔 수 없이 다시, 혼자 뛴다.


 누구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한 때가 있었다. 어렸을 적에, 몸치였던 내가 유일하게 잘했던 종목은 달리기였다. 달리기는 그나마 특별한 리듬이나 순발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끝까지 뛰면 승산이 있으니까. 둔한 내가 출발선에서 조금 늦게 출발하더라도 든든한 허벅지 근육이 끝까지 뛰어주면 힘들어서 걷는 친구들을 제칠 수 있었으니까. 유일하게 1등급을 받아낼 수 있던 체육 시간, 그게 나에게 달리기가 주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요즘도, 계속 뛰고 있다. 이제는 주변에 성적을 겨룰 친구들도 없는데, 혼자서 마냥 뛴다. 언제부터인가, 누구보다 달리기를 잘해서 뛰는 게 아니라, 하루를 버티기 위해서 뛴다. 이제는 나에게 ‘누군가보다 잘한다는 것’이 딱히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오고 있다.


 이제는 내가 몇 등인지, 숫자로 나오지 않는다. 예전에는 그 숫자들을 보며 남들 사이에 있는 내 위치를 확인했다. 그게 불안함을 주기도 했지만, 내 존재를 너무나 쉽게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등수가 올라갈수록 내 가치도 올라가는 듯한 착각도 주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내 삶이 숫자로, 등수로 나오지 않는다. 이 트랙을 뛰는 사람들은 아무도, 내가 몇 등으로 뛰는지 관심이 없다.


 산책길을 혼자 뛰며 생각한다. 뛰면서 제친 사람들은 나와 상관없이 걷는 사람들. 숨이 벅차, 잠시 걷는 나를 스쳐 간 사람들은 나와 상관없이 뛰는 사람들. 모두가 나의 속도는 신경 쓰지 않은 체, 저마다의 속도로 뛰고, 걷고 있다. 서로 가는 방향도 제 각기다. 내가 그들이 가는 방향에 거슬러 뛰어도 그들은 아무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아무리 시선을 주고 그들과 나를 비교해봤자,

알아주는 이는

없다.


 그 사실이 가끔은 외로워서, 누군가, 이 방향으로 뛰는 것이 좋다고, 너의 기록은 남들보다 느린 편이니 더 빨리 뛰어야 한다고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 누군가를 기대할수록 뛰기는커녕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다시, 사람들 속에서 뛰려면 나만의 속도를 알아야 하고, 쉬어가야 하는 타이밍을 알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외로운 순간 속에서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잠시 눈 맞춤을 하고,

뒤처져가는 이의 등을 토닥이며 힘내자고 말하는 순간도 온다.

가끔, 누군가는 자신의 속도를 늦춰 나와 함께 뛰어주기도 한다.

그와 함께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순간의 기쁨.

이미 도착한 사람들의 환영과 뒤이어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나의 말간 얼굴.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선 나는 혼자 뛰는 연습을 꼭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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