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는 세상을 만나다

나의 수어 선생님

by 한여름

주문진 엔젤 베이커리 계산대에 놓인 포스터를 본 것이 시작이다. 베이커리 언니의 큰 아들 친구가 영화감독이라며 한 장 건넸다. 전단지처럼 가벼운 A4 사이즈에 출력한 영화 <나는 보리> 포스터는 바다가 보이는 너무 예쁜 사진이었다.


밤이면 바다 끝 오징어배 불이 보이는 집에 사는 행복한 농인가족의 이야기 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수어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 유튜브로 인사말 영상부터 찾아보며 시작했으나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숨고’앱으로 수영을 배우려고 했을 때는 순식간에 자기소개서와 견적이 쏟아졌지만, 수어 선생님을 찾는다는 게시 글에는 며칠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일주일이 다 되어가던 금요일 저녁 메일에 왔다. 바로 등록을 하고 수업을 하기로 했다. 나중에 선생님이 말하길, 내가 올린 글에 아무도 견적을 보내지 않아서 안쓰러운 마음에 메일을 보내셨단다.


수업은 수요일 저녁 9시에 온라인 줌(zoom)으로 했다. 1년 동안 소방공무원과 경찰공무원준비생, 사회복지학과 대학생, 그리고 주부들이 수어 기초반 단체방을 오가면서 배웠다. 줌 수업 1년 반 만에 단체방에 혼자 남은 지난 5월, 수어 선생님을 처음 카페에서 만났다. 매주 화면으로 만난 선생님은 오래된 친구처럼 반가웠다. 우리는 소리 없이 한참 동안 궁금했던 이야기를 했다. 기초반의 유일한 수강생이라 분기에 한 번은 대면 수업을 하기로 했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수어 선생님은 원래 웹 디자이너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봉사서클에서 배운 수어를 다시 하면서, 사십이 넘어 수어 통역사가 되었다. 가끔 선생님이 말해주는 수어통역 이야기는 늘 흥미진진하다. 복지방송 노래자랑 통역에서 고추장을 파는 홈쇼핑 쇼호스트 통역까지. 암으로 시력을 잃고 청각도 잃어가는 희재 라는 스무 살 청년에게 수어를 가르치고, 의정부에 사는 노부부의 한글수업 통역을 위해 매주 왕복 네 시간을 오가는 것은 소설 같은 이야기다. 작은 체구에 늘 웃는 선생님은 수어를 배우는 사람을 좋다 한다고 하니, 나는 더 열심히 배우고 싶다.


수어는 외국어와 운동의 결합이다. 눈으로 읽고 머리로 생각하고 얼굴과 손으로 말한다.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 감정을 얼굴 표정으로 전달해야 한다. 표정에 따라 같은 단어가 의문문이 되기도 대답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양손 다섯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새끼손가락을 접고 약지를 펴는 것이 어려워, 숫자 8 이 제일 어렵다.


콘서트에서 노래 통역하는 것이 꿈이라 하니, 바로 노래 수업을 시작해 주셨다. 가끔 영상을 찍어 선생님께 교정을 받는다. 급한 성격이 수어를 할 때도 나온다. 선생님은 매의 눈으로 내가 대충 넘어가는 단어를 꼭 집어서 수정해준다. 얼마 전 선생님 가족의 생일 타로를 봤다. 선생님은 나와 같은 전차 카드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다. 청각 장애인에게 타로 봐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며 타로 해석하는 것을 해보자고 했다. 나는 타로를 보고 통역은 선생님이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지만, 바로 다음 수어수업에 타로 카드 해석을 시작했다. 역시 수강생이 하고 싶은 것을 바로 해주는 선생님이다.


비 오는 어느 날, 카카오로 부른 택시에 오르니 “기사님은 청각 장애인입니다”라는 표식이 의자에 걸려 있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머리 속으로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할수록 아득해졌다. 택시가 멈추고, 왼손 등에 오른손을 가로로 세워 감사하다는 말만 간신히 하고 내리는데 거울로 보시던 기사님이 활짝 웃으셨다.

김진유 감독님의 <나는보리>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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