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는다는 것은 환상이다
'갖고 싶다.' 무언가 내 옆에 두고 온전하게 나의 것으로 만들고자 할 때 우리는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명품 시계나 고급 아파트, 스포츠카, 심지어는 멋진 이성을 보고도 갖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죠. 이러한 소유의 개념을 조금 파헤쳐보면 그 의미를 더 구체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물리적으로 곁에 둔다는 것을 넘어 소유욕을 느끼는 대상의 수혜를 온전히 본인만 받고 싶다는 욕구입니다.
정리하자면 '소유=대상을 연유로 한 수혜+타인 배제'의 공식이 도출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당신이 조상으로부터 땅을 물려받았는데, 그 땅이 그린벨트에 묶여있어서 어떠한 권리행사도 불가능하다면 이것을 진정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누군가가 당신에게 롤렉스 시계를 주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나 당신은 일주일에 한 번씩만 이 시용할 수 있고, 나머지 5일은 타인에게 이 시계를 빌려주어야만 합니다. 이런 상황일 때, 당신은 롤렉스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처럼 소유란 개념은 어떠한 대상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위의 공식을 우리가 '가지고 싶은 것'들에 대입을 한다면 진정한 소유가 가능한 물건과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외부적인 상황의 변화로 인해 소유의 개념을 위협하는 상황이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연인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옛날부터 상대방을 본인의 소유로 만들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입증해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습니다. 기혼 여성에게 남성의 성을 따르게 강요하고, 머리 모양이나 의복의 모양을 미혼 때와 다르게 만들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신체에 인위적인 변형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제도적으로 결혼 상대를 서류상 명시하는 방법과 비제도적인 방법으로 반지 등을 끼워 파트너가 있음을 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상대방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성공적으로 성취하지는 못했습니다. 역사상 계층 고하를 막론하고 수많은 불륜과 사생아의 탄생은 이를 뒷받침합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요 2017년 통계청의 조사 결과 전체 이혼 사유의 7%는 배우자의 부정인 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물리적으로, 제도적으로 누군가를 소유하려고 노력한다 해도 이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토지나 사물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일까요? 위에서 예시로 들은 바와 같이 그린벨트 등 국가제도의 영향 아래에 개인이 소지한 토지는 언제나 그 소유관계가 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물의 경우에도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 관계가 변하기도 하는데. 노후 디젤차의 서울 입성 금지 등의 제도가 예시가 될 수 있겠습니다. 노후 디젤 차량을 소유하고 있다한들 원하는 곳으로의 운행이 불가능해진다면 이는 온전한 소유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물도, 토지도, 사람도 그 어느 것도 소유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소유라는 개념이 현실화될 수 있기는 한 걸까요? 외부 상황의 변화나 제약 없이 순전히 내 것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걸까요? 저는 딱 2가지만이 완전한 소유의 조건을 모두 충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로는 음식입니다. 음식은 우리의 체내에 흡수되어 몸을 움직이는 에너지 및 조직을 이루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나와 일체 되어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사물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먹은 음식은 나만이 소유할 수 있고, 나의 일부로 흡수되어 외부 상황의 관계를 일절 받지 않으므로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는 음식을 온전히 소유하는 행위라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지식입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얻게 되거나, 혹은 책을 통해 얻게 된 지식들은 내 머릿속에 안착되어 우리의 삶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지식은 국가나 거대한 힘을 가진 조직들에 의해 강탈당할 수도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뇌에 새겨진 것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이전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내 것이 된 지식은 내가 죽을 때까지 영원히 나의 소유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